HBM 조달부터 공장 데이터·로봇 OS까지, 피지컬 AI 동맹 5대 의제 해부
나흘간 재계 총수·스타트업·대학 훑는 황 CEO, 한국을 플랫폼 생태계로 편입 노려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나흘을 한국에서 보낸다. 재계 총수와 삼겹살을 먹고, TV 예능에 출연하고, 잠실 야구장 마운드에 오른다. 화려한 일정 뒤에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이번 방한에는 다섯 가지 핵심 목적이 있다.
◇ 하루짜리 방문이 나흘로 늘어난 까닭
지난해 10월 황 CEO는 하루 일정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킨집에서 만나는 이른바 ‘깐부 회동’이었다. 당시 핵심 의제는 고대역폭 메모리(HBM·High Bandwidth Memory)와 GPU 공급이었다. HBM은 AI 반도체 옆에 붙어 데이터를 고속으로 전달하는 메모리로, AI 가속기의 두뇌와 혈관에 해당한다.
이번에는 달라졌다. 체류 기간이 4배로 늘었고, 접촉 대상도 반도체 기업을 훌쩍 넘어섰다. 배경에는 AI 산업의 무게 중심 이동이 있다. 그동안 AI 경쟁은 대규모 언어모델(LLM) 개발과 GPU 확보가 전부였다. 이제 전선이 바뀌었다. 공장 자동화, 로봇, 자율주행 등 AI가 현실 공간에 발을 딛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황 CEO는 GTC 타이베이 2026 기조연설에서 “AI는 공장과 로봇, 자동차를 움직이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 전환이 한국을 새로운 전략 거점으로 부각시켰다.
◇ 황 CEO가 한국에서 원하는 5가지
① 메모리 수급 주도권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Vera Rubin)’을 가동하려면 HBM이 필수다. 전 세계 AI 가속기용 고성능 메모리의 약 70%를 한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급한다(업계 분석). 황 CEO는 타이베이 컴퓨텍스 2026에서 SK하이닉스의 5세대 HBM4E 웨이퍼에 “제발 더 만들어줘”라는 친필 사인을 남겼다. 이번 방한에서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상대로 공급 일정 고도화를 압박하면서, 동시에 양사 경쟁심리를 자극해 단가 협상력을 유지하는 이중 전술이 펼쳐질 전망이다.
② 제조 현장 데이터 확보
피지컬 AI의 핵심은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이다. 가상 공간에서 공장을 통째로 시뮬레이션하는 기술이다. 엔비디아는 이미 아이작 심(Isaac Sim)과 코스모스(Cosmos)라는 시뮬레이터를 운영 중이다. 그런데 가상 세계 학습이 실제 공장에서 오작동 없이 구현되려면 정밀한 실물 데이터가 필요하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팹,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조립 라인, 현대차의 무인 생산 라인이 쌓아온 데이터가 엔비디아에는 핵심 자산이다. LG전자와 엔비디아가 스마트팩토리 전환 협력을 진행 중인 것도 이 맥락이다.
③ 데이터센터 냉각 기술 동맹
AI 서버는 엄청난 전력을 소비한다. 발열 관리가 데이터센터 건설의 최대 병목으로 떠올랐다. LG전자는 직접칩 냉각(Direct-to-Chip) 방식의 1.4MW급 고효율 냉각 장비를 미국 AI 데이터센터에 납품 중이다. 황 CEO의 LG 본사 방문은 이 기술을 엔비디아 데이터센터 표준 규격으로 채택하기 위한 협상 자리가 될 것으로 풀이된다.
④ 로봇·자율주행 플랫폼 구축
현대차그룹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이족 보행 로봇 ‘아틀라스(Atlas)’는 엔비디아가 개발 중인 로봇 구동 엔진 ‘아이작 GR00T(Isaac GR00T)’를 실증하기에 최적인 플랫폼으로 꼽힌다. 두산로보틱스와는 산업용 협동 로봇 팔에 엔비디아 소프트웨어를 탑재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테슬라의 자율주행·휴머노이드 연합에 맞설 대항마를 한국 기업들과 함께 구성하려는 포석이다.
⑤ 소버린 AI 거점 확보
‘소버린 AI(Sovereign AI)’는 특정 국가나 문화권이 자국 언어와 데이터로 구축하는 독자 AI 생태계다. 미국 빅테크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움직임이 중동·동남아에서 확산되고 있다. 네이버는 자체 대규모 언어모델 ‘하이퍼클로바X’를 보유한 몇 안 되는 비미국계 빅테크다. 엔비디아는 네이버클라우드를 글로벌 AI 팩토리의 핵심 파트너로 삼아 동아시아·중동 소버린 클라우드 시장을 함께 공략하려 한다.
◇ 기회와 함께 오는 리스크
이번 방한을 마냥 한국에 유리한 행보로만 볼 수는 없다. 한국 기업들이 공장 데이터와 로봇 제조 역량을 엔비디아 플랫폼에 통합할수록 핵심 수익은 설계 권한을 쥔 엔비디아로 집중될 수 있다. 관련 보고서는 이를 ‘플랫폼 소작농’ 리스크로 명명하며, 독자적 로봇 운영체제와 데이터 소유권 확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간 HBM 경쟁을 의도적으로 심화시켜 협상 우위를 점하는 황 CEO의 ‘밀고 당기기’ 전술 역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골드만삭스는 AI 에이전트 확산에 따른 메모리 수요 폭증으로 D램·HBM의 구조적 공급 부족이 2028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 반도체 기업에 유리한 시간이 최소 2년은 남아 있다. 삼겹살 한 점을 나누는 자리가 그 2년의 향방을 가르는 협상 테이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