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긴 새벽 1시, 고3 준우가 서울 목동의 독서실을 나와 편의점으로 들어섭니다. 냉장고 칸엔 알록달록한 에너지 드링크가 여러 종 꽂혀 있습니다. “오늘 벌써 세 캔째네.” 푸른빛 캔을 골라 계산하고 ‘찰칵’ 뚜껑을 땁니다. 톡 쏘는 탄산과 비타민 향이 코를 찌르고, 정신이 맑아지는 듯합니다. 시험 기간, 다시 밤을 새울 각오를 다집니다.
준우의 모습은 일반적인 고등학생의 행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 조사에서 국내 고등학생 10명 중 3명이 주 3회 이상 고카페인 음료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에너지 드링크는 잠을 줄여서라도 버텨야 하는 피로사회의 자화상이자, 편의점 냉장고의 스테디셀러입니다. 카페인과 타우린으로 무장한 이 각성제는 어떻게 우리 곁으로 왔을까요.
카페인, 각성의 발견
이야기는 ‘카페인’에서 시작합니다. 1819년 독일 화학자 프리틀리프 페르디난트 룽게가 커피 원두에서 카페인을 처음 분리해냈습니다. 대문호 괴테가 “커피의 어떤 성분이 사람을 흥분시키는지 밝혀보라”며 건넨 귀한 원두 한 상자가 계기였죠. 카페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커피(독일어 Kaffee)에서 왔습니다. 각성 효과가 뛰어난 카페인은 초기엔 약으로 쓰였습니다.
‘에너지 음료’의 먼 조상으로 1901년 스코틀랜드에서 나온 ‘아이언 브루(Irn-Bru)’가 꼽힙니다. ‘기운을 북돋는 강장 음료’로 홍보한 오렌지빛 탄산음료였습니다. 다만 흔한 오해와 달리 아이언 브루의 카페인 함량은 낮은 편이고(초기 제품엔 아예 없었습니다), 각성제라기보다 강장 음료에 가까웠습니다.
현대적 에너지 드링크의 탄생
우리가 아는 형태의 에너지 드링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이쇼 제약이 1962년 내놓은 ‘리포비탄D’가 그 출발점입니다. 손바닥만 한 갈색 병에 카페인 50mg, 타우린 1000mg, 비타민B를 담아 야근하는 회사원과 장거리 트럭 기사를 겨냥했습니다. 약 같은 맛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고, 고도성장기 일본 직장인들이 야근을 버티게 한 ‘겡키(元気·활력) 음료’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국의 동아제약이 ‘박카스D’를 내놓은 건 바로 뒤인 1963년입니다. 병 모양과 성분이 리포비탄과 매우 닮아 따라서 만들었다는 게 정설이지만, 동아제약은 독자 개발을 강조합니다. 어쨌든 박카스는 60년 넘게 한국을 대표하는 자양강장 음료로 자리 잡았습니다.
리포비탄의 후예는 태국으로도 건너가, 뿌리를 내립니다. 현지 약사 샬레오 유비디야가 만든 ‘크라팅 댕(붉은 황소)’이 그것입니다.
‘레드불’ 혁명
이 아시아 음료를 세계 상품으로 바꾼 건 오스트리아 기업가 디트리히 마테쉬츠였습니다. 1982년 태국 출장 중 크라팅 댕을 마시고 시차 문제로 피곤한 몸이 가뿐해 지는 효과를 경험합니다. 마테쉬츠는 ‘왜 유럽엔 이런 게 없지?’ 하고 무릎을 칩니다.
1984년 크라팅 댕의 창시자인 약사 샬레오와 손잡고 레드불(Red Bull)을 세운 뒤, 1987년 오스트리아에서 첫 제품을 내놨습니다. 날렵한 캔, 독특한 맛, 그리고 “레드불, 날개를 달아드립니다”라는 도발적 슬로건. 무엇보다 전통 광고 대신 익스트림 스포츠를 후원해 ‘에너지·모험·젊음’의 이미지를 새긴 마케팅이 혁명적이었습니다. 레드불은 오늘날 연간 127억 캔(2024년)을 파는 세계 1위 브랜드가 됐습니다.
레드불의 성공은 시장의 수문을 열었습니다. 2002년 큰 캔을 앞세운 ‘몬스터 에너지’가 등장했고, ‘록스타’·’NOS’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한국에도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글로벌 제품이 편의점을 파고들었고, 2010년 롯데칠성이 ‘핫식스’로 응수했습니다.
건강음료 이미지의 박카스와 달리, 이들은 ‘즉각적인 각성’을 내세워 밤샘 공부와 유흥의 짝이 됐습니다. 세계 에너지 드링크 시장은 2024년 약 800억 달러(약 110조 원) 규모로, 레드불과 몬스터 두 브랜드가 8할 이상을 쥐고 있습니다.
각성제가 세상을 정복한 이유, 그리고 대가
에너지 드링크의 질주는 시대와 맞물립니다. 세계화로 경쟁과 노동 시간이 늘었고, 교육열 높은 한국 학생들은 긴 공부를 버티려 이 음료에 기댔습니다. 24시간 연결된 사회는 잠을 갉아먹었고, 그 자리를 인공적 각성이 메웠습니다.
이 모든 수요의 최전선에 24시간 편의점이 있습니다. 새벽 3시에도 냉장고 문만 열면 각성제를 살 수 있는 나라. 에너지 드링크가 ‘세상을 움직이는 제품’이 된 배경이자, 편의점이라는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한 풍경입니다.
하지만 각성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카페인 중독과 수면 장애, 심장 두근거림 우려가 커지면서 규제의 목소리도 높아집니다. 한국은 2018년부터 ‘어린이식생활안전관리특별법’에 따라 초·중·고교 매점과 자판기에서 고카페인 음료를 팔지 못하게 했고, 제품에는 ‘고카페인 함유’ 표시를 의무화했습니다.
청소년의 하루 카페인 권고량은 체중 60kg 기준 150mg, 에너지 드링크 두 캔이면 넘어섭니다. 영국은 2027년부터 16세 미만에게 고카페인 음료 판매를 아예 금지합니다.
새벽 편의점에서 세 캔째를 집어 든 준우처럼, 우리는 피로를 이기려 각성제를 삼킵니다. 하지만 카페인은 피로를 없애는 게 아니라 잠시 미뤄둘 뿐입니다. 에너지 드링크는 앞으로도 모습을 바꿔 살아남겠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센 각성제가 아니라 충분한 잠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