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2억 달러 흑자, 반도체·컴퓨터주변기기가 견인…쏠림은 숙제
무역흑자에도 자본 유출·중동전쟁 겹쳐 환율 17년 만 최고치
숫자 두 개가 같은 날 엇갈렸다. 4월 경상수지 흑자는 282억9000만 달러. 월간 기준 역대 2위다. 1~4월 누적 흑자는 1026억7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를 찍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 원·달러 환율은 야간 거래에서 1540원을 넘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의 최고치다. 나라가 벌어들인 달러는 사상 최대인데, 원화 값은 17년 만에 가장 쌌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 반도체가 떠받친 36개월 연속 흑자
한국은행이 5일 발표한 국제수지 잠정통계를 보자. 4월 경상수지는 282억9000만 달러(약 43조3700억원) 흑자였다. 3월 379억3000만 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경상수지는 36개월 연속 흑자 행진이다. 2000년대 들어 두 번째로 긴 흐름이다.
경상수지는 상품·서비스 수출입에 배당·이자 등 대외 거래를 모두 더한 종합 성적표다. 이번 흑자를 끌어올린 주역은 상품수지다. 4월 상품수지 흑자는 338억8000만 달러. 수출이 905억9000만 달러로 1년 전보다 54.5% 늘었다. 누적 흑자는 작년 같은 기간(240억 달러)의 4.3배에 달한다.
◇ 수출 54% 급증, 그러나 반도체 쏠림
흑자의 질을 보려면 품목을 봐야 한다. 통관 기준으로 컴퓨터 주변기기 수출이 411.3% 폭증했다. 반도체도 171.4% 늘었다. 두 IT 품목이 흑자를 견인했다. 석유제품(39.4%)과 화공품(10.7%) 등 비IT도 거들었다.
수입이 더 줄어 생기는 ‘불황형 흑자’와는 결이 다르다. 4월 수입은 567억 달러로 오히려 16.1% 늘었다. 반도체 제조장비(55.5%), 반도체(52.8%) 등 자본재 수입이 증가를 이끌었다. 설비 투자가 살아 있다는 신호다. 수출이 끌고 수입도 따라 붙은, 건강한 흑자에 가깝다.
문제는 쏠림이다. 흑자가 반도체와 그 주변 IT에 집중돼 있다. 지역별로도 동남아(74.2%)·중국(62.6%)·미국(54.0%) 수출이 동반 급증했지만, 중동 수출은 24.9% 줄었다. 특정 품목과 시장의 호황이 꺾이면 흑자도 함께 흔들릴 수 있다.
◇ 흑자인데 원화가 약한 이유
다시 처음의 역설로 돌아가자. 교과서대로면 경상흑자가 쌓일수록 달러가 들어와 원화 가치가 오른다. 현실은 반대였다. 단서는 금융계정에 있다.
4월 내국인의 해외 직접투자는 62억4000만 달러 늘었다. 해외 증권투자는 주식을 중심으로 82억2000만 달러 증가했다. 무역으로 번 달러가 국내에 머물지 않고 해외 자산으로 다시 빠져나갔다. 본원소득수지도 3월 흑자(35억9000만 달러)에서 4월 적자(25억3000만 달러)로 돌아섰다. 배당 지급이 몰리는 계절 요인에 기업 배당 성향이 높아진 영향이다.
다만 외국인 자금엔 회복 조짐도 보였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 매도는 4월 12억4000만 달러에 그쳤다. 3월 293억3000만 달러 순매도와 비교하면 매도세가 크게 잦아들었다. 한은은 중동 긴장 완화와 반도체 실적 개선 기대가 투자 심리를 일부 되살린 것으로 풀이했다. 외국인 채권 투자도 세계국채지수(WGBI·글로벌 채권 투자의 기준이 되는 지수) 편입 효과로 47억5000만 달러 순유입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 효과를 다시 짓누른 변수가 중동전쟁이다. 분쟁이 격화하면 안전자산 달러로 자금이 몰린다. 원화는 약해진다. 무역흑자만으로 환율을 떠받치기 어려운 구조인 셈이다.
◇ OECD는 성장률 올렸지만…정부의 두 시선
정부는 지표 호조를 앞세웠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5일 비상경제본부 회의에서 OECD를 인용했다. OECD가 올해 한국 성장률 전망을 1.7%에서 2.6%로 대폭 올렸다는 것이다. 반도체 수출과 추가경정예산 효과에 따른 소비 회복이 근거였다. GDP 대비 정부부채비율 전망도 올해 52.0%에서 48.2%로 낮아졌다.
하지만 구 부총리는 곧바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는 “호조세에도 금융·외환시장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다”며 “각별히 경각심을 갖고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중동전쟁 장기화에 따른 시장 불안과 민생물가 부담도 함께 거론했다. 화려한 흑자 뒤에 깔린 불안을 정부도 읽고 있다는 뜻이다.
구 부총리는 “경제 대도약을 위한 구조혁신에 본격 나서겠다”고 했다. 초혁신경제·지역투자·구조개혁이 키워드다. 이날 회의에선 전남 장성에 약 4000억원 규모 데이터센터를 조성하는 방안도 확정됐다. 2028년 운영 개시가 목표다.
숫자는 화려하다. 하지만 흑자의 크기보다 질과 지속성이 관건이다. 반도체 쏠림을 넘어설 동력이 있는가. 벌어들인 달러를 붙잡아둘 환율 방어력이 있는가. 다음 달 통계가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