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조 ‘대도약’…호남이 제2 반도체 기지로

수도권 전력·용수 한계에 메모리 팹 4기 서남권으로
-6.3GW 전력·하루 65만톤 용수 공급이 성패 가를듯

800조원, 81조원, 550조원.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나온 숫자다. 이재명 대통령이 ‘3대 메가프로젝트’로 묶은 반도체·피지컬AI·AI데이터센터 투자 규모다. 합치면 1400조원을 넘는다.

단군 이래 최대 산업 투자라는 말이 과장은 아니다.하지만 이날 더 주목할 발언은 따로 있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꺼낸 한 줄이다. “우리 D램 점유율이 61%에서 50%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도약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나온 위기의 고백이다. 이번 투자는 공격이자 동시에 방어다.

◇ 용인이 한계에 닿았다

출발점은 수도권의 한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용인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고 있다. 그러나 부지는 거의 찼다. 정부는 2035년 이후 수도권에 새 반도체 단지를 세울 땅도, 전력도, 물도 없다고 본다.

수요는 폭발한다. AI가 끌어올린 메모리 수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대만 컴퓨텍스에서 “메모리 병목이 2030년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생산을 못 늘리면 점유율을 잃는다.배경에는 글로벌 총력전이 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향후 5년간 전 세계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5조5000억달러(약 8400조원)에 달한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이 인프라 선점에 사활을 건다. 한국이 답으로 택한 곳이 호남이다. 신재생에너지와 용수가 풍부하고, 균형발전 명분과도 맞물린다.

◇ 800조원, 메모리 팹 4기에 담겼다

800조원은 어디에 쓰이나. 김 장관은 서남권을 ‘제2의 반도체 생산기지’로 만들겠다고 했다.

메모리 팹 4기를 짓는다. 삼성 2기, SK 2기다.핵심은 공정의 성격이다. 당초 거론된 건 후공정, 즉 칩을 완제품으로 조립하는 패키징이었다.

그러나 최종 가닥은 전공정으로 잡혔다. 전공정은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핵심 제조 단계다. 투자도 크고 전력·용수·인력 부담도 후공정과 비교가 안 된다.

팹 1기 건설 비용은 출처마다 갈린다. 최소 60조원에서 100조~150조원까지 추정이 엇갈린다. 충청권에는 별도로 81조원을 들여 패키징 거점을 만든다. 전공정 팹이 늘면 후공정 수요도 따라 늘기 때문이다.

◇ 진짜 변수는 전기와 물이다

메가프로젝트의 성패는 숫자가 아니라 인프라에 달렸다. 반도체 팹은 전기와 물을 대량으로 먹는다.정부 계획을 보자.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 6.3GW 전력과 하루 65만톤 용수를 공급한다(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

용인 클러스터에는 약 15GW와 하루 150만톤이 들어간다. 규모가 가늠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보면 된다.

안선주 전남대 전기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공장이 통상 1GW를 쓰는데, 16GW면 원전 16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AI데이터센터가 더해진다. 정부는 2029년까지 8.4GW 규모를 짓고, 2035년 18.4GW로 늘릴 계획이다(배경훈 부총리).

데이터센터만으로도 원전 8기분 전력이 필요하다.전남의 잠재력은 인정받는다. 태양광 발전량 전국 1위, 해상풍력 잠재력 12.4GW다(안선주 교수). 정부는 호남에서 만든 전기를 호남에서 쓰는 ‘지산지소’ 체계를 약속했다. 다만 잠재력과 실제 공급은 다른 문제다.

◇ 세 번째 축, 피지컬AI의 도전

세 축 가운데 가장 낯선 것이 피지컬AI다. 배경훈 부총리는 이렇게 구분했다. 기존 로봇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 도구다.

피지컬AI는 사람처럼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자율주행차와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이 대표적이다.정부는 2030년까지 피지컬AI 글로벌 1강을 목표로 잡았다.

배 부총리는 “앞으로 3년이 골든타임”이라고 했다. 강점은 제조업 기반과 세계 1~2위 반도체 기업이다. 현장에서 모은 데이터가 데이터센터로 모이고, 다시 로봇으로 돌아가는 선순환이 구상의 뼈대다.

◇ 남은 변수는 속도, 인력, 그리고 논란

천문학적 숫자에는 두 그림자가 따른다. 일단, 집행 시계다. 800조원도 550조원도 한 번에 풀리는 돈이 아니다.

10년, 20년에 걸친 누적 약속이다. 최태원 회장은 향후 10년간 반도체·데이터센터에 210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약속과 집행 사이의 간극은 길다.

인력과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도 해결 과제다. 수도권 엔지니어를 호남으로 끌어올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협력업체 생태계를 새로 짜는 일도 만만치 않다.정치 논란도 변수다. 야권은 정부가 대기업 ‘팔 비틀기’로 호남 투자를 유도했다고 비판한다. 정부는 기업의 자발적 판단이라고 반박한다.

홍익표 청와대 정무수석은 “글로벌 대기업이 팔 비튼다고 아무 데나 가지 않는다”고 했다.

800조원은 약속이지 결과가 아니다. 점유율 방어의 절박함이 투자를 끌어냈고, 전력과 물이 성패를 가른다.

발표는 끝났다. 첫 삽까지, 그리고 첫 칩까지 걸리는 시간이 진짜 시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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