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시구·러브샷에 들썩인 한국
그가 머문 사이 코스피 시총 600조원 실종
92시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에 머문 시간이다. 6월 5일 오후 1시 38분 김포공항에 내려 9일 오전 전용기로 떠났다. 4박 5일. 그 사이 한국은 들썩였다.
그런데 숫자는 반대로 움직였다. 방한 첫날인 5일, 코스피는 ‘검은 금요일’을 맞았다. 8일에는 8%대 폭락. 삼성전자는 30만원, SK하이닉스는 200만원 선이 깨졌다. 하루에 증발한 시가총액이 600조원이다.
세계 시총 1위 기업 CEO가 “한국은 AI G3″라고 외치는 동안, 한국 증시는 무너졌다. 물론 황 CEO 탓이 아니다. 브로드컴의 실망스러운 실적 전망과 미국 금리 인상 우려가 방아쇠였다. 하지만 이 기묘한 엇갈림이 이번 방한의 본질을 보여준다.
환대는 뜨거웠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삼겹살, 시구, 러브샷…그는 왜 그렇게 놀았나
일정표부터 보자.
5일 입국 직후 홍대 삼겹살집.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삼소(삼겹살+소주)’ 회동을 했다. 구 회장이 직접 고기를 구웠다. 황 CEO는 “More HBM!”을 외치며 시민 호응을 유도했다.
6일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 녹화와 PC방 방문. 7일 잠실야구장 시구,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우래옥 평양냉면. 8일 하루에만 SK서린빌딩, LG트윈타워, 현대차 양재 사옥, 서울대, 네이버 1784, 신라호텔 간담회를 돌았다. 만 63세가 소화한 일정이다. 본인 입으로 “정말 피곤하네요”라고 했다.
외신도 주목했다. CNBC는 한국에서 황 CEO의 동선과 일정을 지도로 보여주는 ‘젠슨 황의 발자취’라는 웹사이트까지 등장했으며, 그를 향한 관심이 글로벌 셀럽급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K팝 스타급 환대였다.
쇼맨십일까. 절반은 맞다. 나머지 절반은 계산이다. 황 CEO는 방한 목적을 “공급망을 긴밀히 조율하기 위해서”라고 직접 밝혔다. 빅테크의 AI 인프라 투자로 메모리 공급 부족이 이어지는 지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고대역폭메모리·AI 칩에 붙는 고성능 메모리) 없이는 엔비디아도 없다. 두 회사가 엔비디아 HBM의 약 70%를 댄다. 삼겹살은 공급망 관리의 다른 이름이었다.
보따리 점검: 네 개의 신제품, 세 개의 동맹
황 CEO는 “한국에 큰 선물로 새 사업 4개를 가져왔다”고 했다.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 CPU ‘베라’, 첫 AI 노트북 ‘RTX 스파크’, 로봇용 플랫폼 ‘젯슨 토르’. 모두 HBM4 등 한국산 메모리를 대량으로 빨아들일 제품이다.
기업별 성과는 세 갈래로 정리된다.
반도체. SK하이닉스는 베라 루빈 등 엔비디아 핵심 로드맵 제품군을 공동 개발한다. 최태원 회장은 “SK그룹과 엔비디아의 협력”으로 차원을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부품 납품사가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는 ‘공동 설계 파트너’로 격상된 셈이라는 게 양사 설명이다.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도 황 CEO와 HBM·파운드리 장기 협력을 논의했다.
로보틱스. LG는 엔비디아의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 ‘아이작 그루트’ 기반으로 휴머노이드와 물류 로봇을 공동 개발한다. 현대차는 자율주행·로봇 협력에 더해 9조원짜리 새만금 프로젝트에 엔비디아 참여를 제안했다. 황 CEO의 답이 걸작이다. “훌륭한 돼지고기 바비큐가 있다면 기꺼이.” 농담이지만, 거절은 아니었다.
AI 인프라. SK하이닉스·SK텔레콤·네이버는 GPU 수십만 장이 들어가는 기가와트급 ‘AI 팩토리’를 한국에 짓는다. 정부 차원에서는 엔비디아가 한국 정부와 주요 기업에 26만장이 넘는 최첨단 AI 칩을 공급하기로 한 지난해 APEC 합의가 토대다. 배경훈 부총리는 이번 단독 면담에서 차세대 GPU ‘베라 루빈’의 한국 최우선 공급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황 CEO의 총평은 이랬다. “향후 5년간 수천억 달러 규모의 수익이 한국에서 창출될 것.”
그런데, 계약서는 어디 있나
여기까지가 기대다. 이제 뒤집어보자.
이번 방한에서 나온 합의 대부분은 양해각서(MOU)나 구두 약속 수준이다. MOU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이행 의무도, 위반 시 페널티도 없다. ‘수천억 달러’는 황 CEO의 전망이지 계약 금액이 아니다. 배경훈 부총리가 황 CEO 앞에서 던진 한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엔비디아도 쇼(SHOW)만 하지 말고 투자도 해달라.” 환대의 한복판에서 나온, 가장 한국적인 청구서였다.
구조적 우려는 더 무겁다. 한국 반도체가 엔비디아 HBM의 70%를 공급한다는 사실은 양날의 검이다. 엔비디아에 한국이 필수라는 뜻이지만, 거꾸로 한국이 엔비디아 없이는 이 물량을 소화할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설계는 엔비디아, 제조는 한국. 이 분업이 고착되면 원·하청 구조가 된다.
기시감이 있다. 1980년대 일본이다. NEC, 도시바, 히타치는 세계 D램의 80%를 쥐고도 ‘제조는 일본, 설계는 미국’ 분업에 안주했다. 미·일 반도체 협정, 엔고, 삼성전자의 역습이 겹치자 무너졌다. 40년 전 일본의 자리에 지금 한국이 서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업계에서 나온다.
중국 변수도 있다. 엔비디아가 로보틱스에서 한국을 치켜세운 배경에는 기술력 못지않게 지정학이 있다. 미국 수출통제로 중국에 최신 GPU를 못 파는 지금, 한국은 제약 없이 엔비디아 플랫폼을 들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맹국이다. 뒤집어 말하면, 미·중 관계가 풀리는 순간 한국의 프리미엄은 희석된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 로봇 시장이고, 유니트리 같은 중국 휴머노이드 기업들은 엔비디아 플랫폼 위에서 달리고 있다.
폭락장에서 그가 한 말
다시 8일, 코스피가 무너지던 날로 돌아가자.
서울에 있던 황 CEO에게 증시 급락에 대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의 답은 신중한 경영자의 답이 아니었다. 황 CEO는 이번 매도세가 매수 기회이며 AI 구축은 이제 시작 단계라고 말했고, 블룸버그는 한국 증시가 실시간으로 하락하는 와중에 서울에서 공개적으로 매수를 권한 것이 의도된 행보였다고 분석했다.
AI 거품론이 번지는 시점에, AI 붐의 최대 수혜자가 폭락장 한복판에서 “지금이 살 때”라고 말했다. 확신일까, 영업일까. 둘 다일 것이다. 분명한 건 그가 자기 발언의 무게를 정확히 알고 장소와 타이밍을 골랐다는 점이다. 한국 언론이 삼겹살을 찍는 동안, 그는 글로벌 투자자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9일 아침, 황 CEO는 묵었던 호텔을 조용히 나서 전용기 편으로 영국 애버딘으로 떠났다. 한국은 그의 글로벌 순회 일정의 한 정거장이었다.
남은 것: 선물이 아니라 시험지
정리하자.
황 CEO가 남긴 것은 세 가지다. 첫째, 한국을 ‘AI G3’로 호명한 브랜딩. 둘째, 메모리·로봇·AI 팩토리를 아우르는 협력 청사진. 셋째, 아직 계약서가 되지 못한 약속들.
기회는 실재한다. 황 CEO가 꼽은 한국의 강점, 즉 빠른 기술 수용 문화, 동서양에 열린 지정학적 위치, 미국에 없는 제조 기반은 과장이 아니다. AI와 제조업의 결합이 다음 격전지라면 한국만 한 무대는 드물다.
위험도 실재한다. 단일 고객 매몰, 원·하청 고착, 지정학 프리미엄의 유효기간. 국내 팹리스 업계의 진단이 답에 가깝다. 엔비디아와의 계약을 최종 목표로 삼지 말고, 엔비디아를 도구로 삼아 기술 수준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젠슨 황은 산타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계산이 빠른 세일즈맨이다. 그가 두고 간 보따리의 정체는 선물이 아니라 시험지다. 채점은 5년 뒤에 나온다. 답안을 쓰는 건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