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710조 AI 빚 시장’을 열다

  • 엔비디아, 아폴로·블랙록·블랙스톤 등 6개사와 MOU
  • 젠슨 황 “AI에서 컴퓨트는 곧 매출”…GPU를 담보 자산으로
  • 돈 대는 곳은 보험사·연기금…손실 가면 노후자금 직격
  • SK그룹 AI 팩토리·HBM 공급도 같은 자금 구조에 연결

엔비디아 주가가 2.86% 내렸다. 종가 217.55달러. 같은 날 엔비디아에 돈을 빌려주기로 한 아폴로글로벌과 블랙스톤, KKR 주가는 올랐다.

지난 10일(현지시간) 엔비디아는 월가 6개 금융회사와 5000억달러(약 710조원) 규모 AI 인프라 자금조달 플랫폼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회사 역사상 최대 금융 거래다.

이상한 장면이다. 보통 이런 발표가 나오면 주가가 오른다. 그런데 반대였다. 큰돈을 쥐게 된 회사는 빠지고, 돈을 굴리는 회사는 올랐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금광에서 곡괭이 팔던 회사

골드러시 때 가장 돈을 번 사람은 광부가 아니라 곡괭이 장수였다는 말이 있다. AI 시대의 곡괭이 장수가 엔비디아다. AI를 만들려면 엔비디아 반도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광부들 주머니가 비었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이런 회사들이 AI 데이터센터를 짓느라 돈을 쏟아붓고 있다. 벌어들이는 현금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회사채를 찍었다.

그래도 모자라자 주식까지 새로 발행했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은 6월에 120조원어치 주식을 찍었다. 2004년 상장 이후 처음이다. 그래도 부족하다는 안팎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엔비디아가 나섰다. AI 인프라 대규모 자금조달 플랫폼을 통해 물건 살 돈을 구해다 주기로 한 것이다.

이 플랫폼의 작동 방식은 이렇다. 먼저 데이터센터 한 곳마다 회사를 하나씩 만든다. 그 건물만 가진 껍데기 회사다. 이를 특수목적법인(SPV)이라고 부른다.

이 회사가 채권을 찍어 돈을 빌린다. 건물주가 임대수입을 담보로 대출받는 것과 같다.

아폴로 같은 사모대출 기관이 그 채권을 산다. 그리고 잘게 쪼갠다. 쪼갠 조각을 다시 판다. 이게 자산유동화증권(ABS)이다. 앞으로 들어올 임대료를 조각내 파는 상품이라고 보면 된다. 최종 구매자는 은행과 보험사, 연기금이다.

여기서 이번 발표의 성격이 드러난다. 황 CEO는 CNBC 인터뷰에서 이 자금이 전부 제3자 자본이라고 밝혔다. 6개 금융사가 자기 돈을 넣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들은 돈 주인이 아니다. 돈을 모아 전달하는 중개인이다.

결국 AI 투자가 어긋나면 앞으로 손실은 보험 계약자와 연금 가입자가 떠안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픽카드를 담보로 잡는다

여기서 걸리는 대목이 있다. 담보가 뭐냐는 것이다. 상가 건물은 30년을 간다. 세월이 지나도 값이 남는다. AI용 그래픽카드는 다르다. 새 제품이 2~3년마다 나온다. 헌 것은 금방 밀린다.

빅테크 회사들은 이 장비를 5~6년 쓰는 물건으로 치고 장부를 짠다. 오래 쓰는 물건으로 잡을수록 해마다 털어내는 비용이 줄고, 이익은 커 보인다.

여기에 이의를 단 사람이 있다. 영화 ‘빅쇼트’로 알려진 투자자 마이클 버리다. 실제로는 2~3년이면 수명이 다한다는 주장이다. 엔비디아는 반박했다. 고객들이 실제로 4~6년씩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맞는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결과는 예상 가능하다. AI 열기가 식으면 담보 값이 먼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7월 29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해석을 하나 내놨다. 데이터센터를 쪼개 파는 이 상품은 일반 금융상품과 다르다는 내용이다.

이 해석 덕에 규정 두 가지가 빠졌다. 하나는 상품을 만든 쪽이 위험의 일부를 직접 떠안게 하는 장치다. 자기가 만든 걸 자기도 먹어보라는 취지의 규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외부 실사 결과를 공개할 의무다.

◇돈이 한 바퀴 돌아온다

또 하나 불편한 대목이 있다. 엔비디아가 고객 돈줄을 받쳐준다. 고객은 그 돈으로 엔비디아 칩을 산다. 엔비디아 매출이 늘어난다. 돈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셈이다. 소위 ‘순환금융’이다.

7월 말 이 논란이 크게 불거졌다. 엔비디아가 오픈AI의 데이터센터 임대료를 대신 물어주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친구 전세대출에 보증을 서주는 것과 비슷하다.

오픈AI는 아직 적자 회사라 혼자서는 돈을 빌리기 어렵다. 오픈AI는 엔비디아의 가장 큰 수요처이기도 하다. 엔비디아가 돈을 빌려주고, 물건을 팔아 다시 그 돈을 돌려 받는 모양세다.

엔비디아 쪽 설명도 있다. 이번엔 자기 돈 대신 AI 인프라 자금조달 플랫폼을 통해 남의 돈을 쓰니 오히려 고리를 끊는 쪽이라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다른 뜻도 된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회사도 이 판을 혼자 감당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지난 7월 24일 엔비디아와 SK그룹이 손을 잡았다. SK텔레콤이 AI 데이터센터를 짓고, SK하이닉스가 AI용 메모리를 오래 대주는 내용이다. 아직 정식 계약은 아니고 서로 하겠다는 약속 단계지만 이 판에 들어가는 건 확실해 보인다.

산업 구조상 이 판에서 빠지기도 힘든 상황이다. 한국 반도체 회사들이 파는 HBM이 바로 이 AI용 메모리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붕괴되면 한국 반도체 회사들의 판매처가 흔들린다는 이야기다.

◇채권시장으로 옮겨간 위험

이 구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조짐은 이미 보인다.

올해 초만 해도 AI 회사들이 빚을 내겠다고 하면 돈이 몰렸다. 사겠다는 주문이 물량의 다섯 배까지 들어왔다. 7월에는 두 배 아래로 떨어졌다. 파는 쪽은 늘고 사는 쪽은 줄었다. 이러면 이자가 오른다. 데이터센터 짓는 비용도 따라 오른다.

3주 사이 일이 순서대로 벌어졌다. 7월 하순 신용평가사가 빅테크 빚을 경고했다. 7월 29일 규제 문턱이 낮아졌다. 8월 10일 엔비디아가 돈줄을 열었다.

이제 AI 투자의 위험은 주식시장에만 있지 않다. 빚으로 옮겨갔다. 다음에 탈이 난다면 주식시장보단 채권시장이 될 확률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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