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그랜섬 “미국 기술주 팔라” 경고의 진짜 의미
기술주 초입론과 버블론 사이에서 투자자가 봐야 할 것
“미국 주식을 갖지 마라.”
단순한 전망이 아니었다. 거의 경고에 가까웠다. 세계적 투자자 제러미 그랜섬은 구독자 1790만명을 보유한 미국 유튜브 채널 The Diary Of A CEO에 출연해 미국 주식, 특히 미국 기술주에 대해 극도로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국내 더빙·번역 제목으로는 ‘주식시장 초비상: 지금 당장 매도하라, “대폭락까지 단 몇 주 남았다!”’로 소개된 인터뷰다. 원제는 플랫폼에 따라 ‘Stock Market EMERGENCY: Sell Your Stocks Now, The Collapse Is Weeks Away!’ 또는 ‘Billionaire’s WARNING: I’M SELLING. The Crash Is Already Here!’로 표기된다. 해당 에피소드는 6월 25일 공개됐고, 진행자는 스티븐 바틀렛, 출연자는 GMO 공동창업자이자 장기투자 전략가인 제러미 그랜섬이다.
그랜섬의 발언은 직설적이었다. 그는 S&P500도 피하라고 했다. 미국 기술주 비중이 크다면 “모두 팔라”고까지 말했다. 암호화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비트코인은 장기적으로 “제로가 될 것”이라고 했다. 대신 그는 비미국 주식, 채권, 현금성 자산, 일부 금·은 같은 귀금속을 거론했다.
얼핏 들으면 모순이다. 그랜섬은 AI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AI를 철도, 인터넷에 맞먹는 거대한 기술 변화로 본다.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위대한 기술일수록 모두가 같은 미래를 믿고 돈을 밀어 넣는다. 그 과정에서 주가는 실제 변화보다 훨씬 빨리, 훨씬 비싸게 미래를 당겨온다. 철도도 그랬고, 인터넷도 그랬다. 기술은 살아남았지만, 고점에 산 투자자는 무너졌다.
그랜섬이 반복해서 꺼내는 사례는 아마존이다. 인터넷은 진짜 혁명이었다. 아마존은 결국 세계 유통 질서를 바꿨다. 그러나 닷컴버블 붕괴 당시 아마존 주가는 고점 대비 90% 이상 추락했다. 기술의 방향을 맞힌 투자자라도 가격을 잘못 사면 긴 시간을 잃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AI가 가짜”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가 진짜라서, 그래서 더 큰 버블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지금 기술주 투자가 이미 끝난 게임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시장의 주류 전망은 여전히 AI 투자 사이클이 향후 몇 년간 이어질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모건스탠리는 2028년까지 글로벌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만 약 2조9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AI 관련 투자가 단순한 소프트웨어 유행이 아니라 반도체, 서버, 전력, 냉각, 건설, 서비스업까지 끌고 가는 산업적 설비투자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JP모건자산운용도 비슷한 흐름을 짚었다. 대형 클라우드 기업들의 AI 자본지출은 현금흐름 대비 부담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2023년에는 하이퍼스케일러 영업현금흐름의 33% 수준이던 AI 관련 자본지출이 2026년에는 93%까지 올라갈 것으로 추정했다. 돈이 빠지는 국면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돈이 들어가는 국면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시장의 고민이 갈린다. 낙관론자는 이를 “AI 투자의 초입”으로 본다. 반도체, HBM, 서버, 데이터센터, 전력망, 냉각 설비, 네트워크 장비까지 돈이 흘러가는 산업 사슬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비관론자는 같은 숫자를 보고 정반대 결론을 낸다. 너무 많은 돈이 너무 빠른 속도로 들어가고 있으며, 투자수익률이 확인되지 않으면 결국 과잉투자의 청구서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맞는 것은 아니다. AI 대세론과 버블론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AI는 앞으로 몇 년간 자본시장의 핵심 테마로 남을 수 있다. 동시에 일부 AI 주식은 이미 너무 비쌀 수 있다. AI 인프라 투자는 계속 늘어날 수 있다. 동시에 투자비를 감당해야 하는 기업의 주가는 실적 검증 국면에서 흔들릴 수 있다.
현재 미국 증시가 싸지 않다는 점도 분명하다. FactSet에 따르면 S&P500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은 20.4배로, 5년 평균 19.9배와 10년 평균 19.0배를 웃돈다. 다만 같은 자료에서 2026년 S&P500 이익 증가율 전망은 24.1%로 제시됐다. 주가가 비싼 것은 맞지만, 이익 전망도 강하다. 그래서 지금 논쟁은 단순한 고평가 논쟁이 아니다. 비싼 가격을 정당화할 만큼 이익이 계속 늘어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기술주 투자자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바꿔야 한다. “AI를 살 것인가, 팔 것인가”가 아니다. “AI의 어느 층위를 살 것인가”가 더 정확한 질문이다. AI 시대의 돈은 한곳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먼저 돈을 받는 곳은 반도체, HBM, 서버, 데이터센터, 전력, 냉각, 네트워크 장비다. 이들은 AI 투자비의 수취자다. 반대로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 메타 같은 하이퍼스케일러는 장기 승자 후보이면서 동시에 막대한 투자비를 부담하는 기업이다. 시장은 이제 “AI를 한다”는 선언보다 “그 돈이 언제, 얼마의 이익으로 돌아오느냐”를 묻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랜섬의 “미국 기술주 전량 매도론”을 문자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미국 빅테크는 닷컴버블 당시의 적자 인터넷 기업들과 다르다. 막대한 현금흐름, 글로벌 플랫폼, 독점적 생태계, 실제 고객 기반을 갖고 있다. AI 인프라 투자는 이미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기업의 매출로 연결되고 있다. 기술주를 완전히 비우는 것은 AI가 틀렸다는 쪽에 베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랜섬이 찌른 약점은 분명하다. 미국 기술주만 들고 있는 포트폴리오는 생각보다 분산돼 있지 않다. S&P500이나 나스닥 ETF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지수 안에서 빅테크와 AI 관련주의 비중이 커졌다면, 실제로는 미국 AI 성장주에 집중 투자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적인 결론은 매도가 아니라 비중 조절에 가깝다. AI 핵심 노출은 유지하되, 미국 기술주 일변도는 줄일 필요가 있다. 반도체와 빅테크뿐 아니라 전력망, 데이터센터 인프라, 산업 자동화, 사이버보안,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일 일반 기업까지 시야를 넓혀야 한다. 동시에 단기채, MMF, 금, 배당주, 비미국 주식 같은 완충 자산도 필요하다.
현금성 자산을 들고 있다는 것은 투자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인플레이션 시대에 현금은 장기적으로 약한 자산이다. 그러나 고평가 성장주가 40~50% 흔들릴 때 다시 살 수 있는 선택권이기도 하다. 돈의 가치는 물가 때문에 조금씩 깎이지만, 버블 붕괴는 한 번에 자산 가격을 크게 깎는다. 그 차이를 관리하는 것이 포트폴리오 전략이다.
그랜섬의 경고는 과격하다. “미국 주식을 다 팔라”는 결론은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의 문제 제기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AI 혁명이 맞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투자자는 더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이 기업은 AI로 돈을 벌고 있는가. 아니면 AI에 돈을 쓰고 있는가. 주가는 이미 몇 년 뒤의 성공을 다 반영한 것은 아닌가. 내 포트폴리오는 AI 혁명에 투자하고 있는가, 아니면 미국 기술주 일부에 몰려 있는가.
지금 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AI는 버블이니 모두 팔자”는 공포다. 다른 하나는 “AI는 혁명이니 무조건 사자”는 확신이다.
더 나은 답은 그 사이에 있다. AI 대세는 인정하되, AI 대세에 취하지 않는 것. 기술주 투자는 계속하되, 가격과 집중도를 관리하는 것. 혁명에는 올라타되, 혁명의 이름으로 모든 위험을 정당화하지 않는 것.
제러미 그랜섬의 경고를 이렇게 번역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AI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AI라는 이름으로 너무 비싸진 자산에 인생의 금융 미래를 몰아넣지 말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