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1분기 국민소득 잠정…디플레이터 12.9%, 45년 만의 최고
실질 GNI 역대 최고지만…반도체 사이클·물가가 변수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한 분기 만에 10.5% 뛰었다. 한국은행이 9일 발표한 2026년 1분기 국민소득 잠정치다. 1976년 1분기 이후 50년 만에 가장 큰 폭이다.
◇ 명목과 실질, 무엇이 다른 걸까
GDP는 두 가지로 잰다. 명목은 그해 가격을 그대로 반영한 값이다. 실질은 물가를 걷어낸 생산량만 본다. 값이 오르면 명목은 부풀고, 실질은 제자리걸음을 한다.
실물 흐름이 나빴던 건 아니다. 1분기 실질 GDP는 1.8% 성장해 속보치(1.7%)보다 높아졌다. 2020년 3분기 이후 5년 6개월 만에 최고다. 수출(5.9%)과 설비투자(6.6%)가 끌어올렸다.
그런데도 명목과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간극을 만든 건 GDP디플레이터다. 명목 GDP를 실질 GDP로 나눈 값으로, 수출입 가격까지 포함하는 종합 물가지표다. 1분기엔 1년 전보다 12.9% 올랐다. 1981년 3분기(16%) 이후 45년 만에 최고다.
고도성장기로 돌아간 걸까. 아니다. 같은 기간 실질 GDP 증가율은 1.8%에 그쳤다. 명목과 실질의 차이가 8%포인트를 넘는다. 이 격차의 정체를 모르면 ‘10.5%’는 오독하기 쉬운 숫자다.
◇ 임금 4%, 기업이윤 17%…기록 행진
명목 GDP를 소득 쪽에서 뜯어보면 항목마다 기록을 갈아치웠다. 근로자 몫인 피용자보수가 전기 대비 4.0% 늘었다. 2010년 2분기 통계 작성 이후 최고다. 기업 몫인 총영업잉여(매출에서 인건비 등 비용을 뺀 이윤)는 17% 급증했다. 이 역시 역대 최고다.
한국은행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수출기업의 제조업 임금 상승을 호조의 배경으로 꼽았다. 다만 과실은 기업에 쏠렸다. 임금이 4%대 늘 때 이윤은 17% 뛰었다. 명목 국민총소득(GNI)이 11% 늘어 명목 GDP를 웃돈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76년 1분기(12.7%)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해외에서 번 소득에서 외국인이 국내에서 번 소득을 뺀 국외순수취요소소득이 9조2000억원에서 13조7000억원으로 불어난 영향이다(한국은행).
◇ 소비자물가는 2%인데 왜 12.9%인가
의문이 남는다. 물가가 12.9% 올랐다면 장바구니도 그만큼 비싸졌어야 한다. 그런데 1분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대 초반이었다(1~2월 2.0%, 3월 2.2%·국가데이터처). 디플레이터와의 격차가 5배를 넘는다.
답은 수출가격에 있다. GDP디플레이터엔 소비자물가뿐 아니라 수출품 가격도 들어간다. 반도체값이 뛰면 디플레이터도 함께 솟는다. 1분기 디플레이터 급등은 반도체 등 수출가격 상승이 상당 부분 끌어올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단순한 물가 부담과 다르다. 수출품값이 수입품값보다 더 오르면, 같은 양을 팔아도 더 많이 번다. 교역조건 개선이다. 실질 GNI가 9.2% 늘어 역대 최고를 기록한 배경이다. 1년 전인 지난해 1분기엔 실질 GDP가 -0.2%, 디플레이터가 2.4%였다(한국은행). 1년 만에 풍경이 뒤집혔다.
◇ 반도체값이 떠받친 ‘명목 호황’
화려한 숫자엔 단서가 붙는다. 우선 반도체 가격 사이클에 기댄 성장이다. 메모리값이 꺾이면 디플레이터도, 명목 GDP도 빠르게 식는다.
과실이 고르지 않다. 임금(4.0%)보다 기업이윤(17%)이 훨씬 빨리 늘었다. 명목 지표 호조가 가계 체감으로 곧장 이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소비자물가가 다시 오른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1~2월 2.0%였던 상승률은 5월 3.1%로 뛰었다. 26개월 만에 최고다.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유가 상승이 석유류값을 24.2% 끌어올렸다. 원·달러 환율도 6월 5일 1554원까지 밀려 수입물가 부담을 키운다.
기초 체력도 짚어야 한다. 지난해 연간 실질 성장률은 1.1%였다. 코로나가 덮친 2020년(-0.7%) 이후 가장 낮다. 명목 기준으로도 4.4%에 머물렀다(한국은행). 분기 명목 호황과 별개로, 실물 경기 회복은 더디다.
명목 10.5%는 허수가 아니다. 다만 그 안엔 반도체값과 물가가 두껍게 끼어 있다. 관건은 이 호황이 반도체 사이클을 넘어 임금과 내수로 번질 수 있느냐다. 그 답에 따라 ’50년 만의 숫자’의 무게도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