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 한국 사회에서 라면은 유혹의 상징입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 2001년)에서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건넨 “라면 먹을래요?”가 원조죠. 그 한마디는 20여 년 만에 ‘내 집에 들어와 자고 가라’는 관용 표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편의점에서도 라면은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걸 사러 갔다가도 누군가 컵라면을 후루룩거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이 친구였다면 100% 이렇게 나옵니다. “한 젓가락만!”
외국인이 한국 편의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야식 1위가 라면이라고 합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컵라면이 수십 종, 봉지라면을 끓여주는 기계를 갖춘 점포도 있습니다. 간이 테이블에서 전자레인지에 돌린 핫바와 곁들이는 라면은 언제나 참을 수 없는 유혹입니다.
한국인에게 라면은 거의 식량입니다. 2024년 기준 1인당 연 79개, 닷새에 한 번꼴로 먹습니다. 국내 라면 생산액은 2023년 2조 9000억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여기에 수출이 폭발적으로 더해집니다. 라면 수출액은 2024년 12억 5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데 이어, 2025년 처음으로 15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2015년 이후 11년 연속 최고치 경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한국 라면을 후루룩 삼키고 있습니다.
1963년, 첫 한국 라면
이렇게 친숙한 라면의 역사는 의외로 짧습니다.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이 나왔습니다. 삼양식품 창업자 전중윤 회장이 일본 출장 중 라면을 접한 게 계기였습니다.
현대 인스턴트 라면의 원조는 1958년 일본 닛신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가 내놓은 ‘치킨라멘’입니다. 전후 식량난 속에서 싸고 간편한 한 끼로 개발됐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전시 비상식량에 닿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삼양식품은 일본 2위 업체 묘조식품에서 기술을 들여와 첫 제품을 내놨습니다(닛신은 기술 전수를 거부했습니다). 첫 라면 값은 10원. 당시 김치찌개 30원, 커피 35원과 견주면 파격이었습니다. 끓는 물만 부으면 5분 만에 한 끼가 완성되는 신기함에 삼양라면은 출시 첫해 20만 개, 1965년엔 100만 개 넘게 팔렸습니다.
서민의 한 끼에서 문화 아이콘으로
1960~70년대, 라면은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노동자들의 값싸고 든든한 끼니였습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6)에서 가난한 명희가 먹고 싶은 것을 묻자 “사이다, 포도, 라면, 빵…”이라 답하는 장면은, 라면이 이미 누구나 선망하는 음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1980년대엔 단순한 식품을 넘어 문화 아이콘이 됩니다. 지금도 시장을 주도하는 신라면·안성탕면·짜파게티·진라면·팔도비빔면이 모두 이때 태어났습니다.
1990년대는 ‘컵라면의 시대’였습니다. 주 5일 근무, 여가 증가, 1인 가구 확대로 간편식 수요가 늘었고, 24시간 뜨거운 물을 제공하는 편의점이 컵라면 시장을 폭발시켰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역설적으로 라면 호황을 불렀습니다. 이때부터 라면은 어려운 시기를 버티는 생존의 상징이 됐고, 물가가 뛰어도 정부가 라면값만은 붙드는 관행도 이 무렵 굳어집니다.
세계로 뻗는 라면
라면은 일본에서 출발해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닛신은 1971년 최초의 컵라면 ‘컵누들’을 내놓으며 산업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다만 원조국 일본은 1980년대 이후 주춤했고, 그사이 한국과 중국이 자체 제품으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세계 최대 소비국 중국은 1967년 일본 기술을 들여와 첫 라면을 생산했습니다. 한국보다 4년 늦은 셈이죠.
2000년대 한류와 함께 한국 라면은 ‘K-푸드’의 대표 주자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러시아에서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진출한 ‘팔도 도시락’은 현지 용기면 시장의 60% 안팎을 점유하는 1위로, ‘도시락(Доширак)’이 컵라면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굳었습니다. 최근 성장의 견인차는 불닭볶음면입니다. 글로벌 누적 판매 50억 개를 돌파했고, 삼양식품은 매출의 80%를 해외에서 거둡니다. SNS ‘불닭 챌린지’는 한국 라면을 세계적 화제로 만들었습니다. 한국 라면은 2024년 141개국에 수출됐습니다.
1인가구의 먹거리
급격한 1인가구 증가는 라면에 더없는 호재입니다. 끓는 물만 있으면 몇 분 만에 한 끼가 해결되고, 값이 싸며, 상온에서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작은 냉장고로 사는 이들에게 쟁여두기 좋은 식량인 셈이죠.
라면은 외로움을 달래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드라마와 예능 속 수많은 인물이 홀로 라면을 먹습니다. 그 익숙하고 친근한 장면은, 혼자 식탁에 앉은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 됩니다. 1~2인 가구가 늘어나는 시대, 라면의 유혹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