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척으로 73척과 맞서 함선 손실 없이 59척 격침
지형·정보·보급을 읽어낸 함대 운용의 승리
1592년 음력 7월 8일, 이순신은 ‘싸우기 좋은 자리’를 먼저 버렸다. 일본 함대 73척이 들어와 있던 견내량은 폭이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좁은 물목에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움직이며 싸우기에 불리한 해협이었다. 판옥선이 서로 부딪칠 만한 곳이었다. 이순신은 그 길목에서 정면으로 맞붙지 않았다. 판옥선 대여섯 척을 먼저 내보내 공격하다 물러나는 척하며 적을 한산섬 앞 넓은 바다로 끌어냈다. 이긴 뒤를 계산하기 전에, 이길 자리를 먼저 골랐다. 학익진은 그다음이었다.
■ 무너진 전선의 예외, 전라좌수사 이순신
임진왜란 개전 두 달, 육상 방어선은 무너지고 있었다. 바다는 달랐다. 일본 수군은 옥포·당포·당항포·율포에서 잇따라 패했다. 그 앞을 막은 이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곧 전라좌수사 이순신이었다. 이순신(1545~1598)은 한산에서 홀로 싸우지 않았다. 이억기(전라우수사)·원균(경상우수사)과 합류해 세 도의 전선 55척을 이끌었다. 이 승리 이듬해 그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다. 한산은 그 출발점이었다.
■ 숫자로 본 한산, 55척이 73척을 삼키다
맞붙은 전력은 조선 55척, 일본 73척이었다. 일본 함대는 대선 36척·중선 24척·소선 13척으로 짜여 있었다. 지휘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앞선 육전(용인 전투)에서 소수 병력으로 대군을 물리친 경험을 근거로 조선 수군을 얕본 채 단독 출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조선 수군은 왜선 47척을 불태워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했다. 모두 59척이었다(격침 규모는 기록에 따라 66척으로도 전한다). 반면 조선 함대가 잃은 배는 한 척도 없었다. 인명 피해는 전사 19명, 부상 119명으로 집계됐다.
전과보다 무거운 것은 전략적 파장이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남해안 제해권을 확보했고, 일본의 수륙병진 계획이 좌절됐다. 부산과 남해를 잇는 해상 보급로가 흔들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 ‘해전 금지’ 명령을 내리고 해안에 성을 쌓게 하며 전략을 수정했다. 육상에서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일본군의 발이 바다에서 묶인 것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해전으로 일본이 한쪽 팔이 끊어진 것처럼 되었고, 그 덕에 조선이 군량과 호령을 이어 국가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적었다. 훗날 외국 역사가 헐버트는 이 해전을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에 비유했다.
■ 함대를 움직인 판단, 학익진은 구호가 아니었다
한산을 설명하는 말은 학익진이다. 날개를 편 진형은 적을 에워싸는 그림으로 남았지만, 실제로는 유인, 거리 조절, 함대 간 호흡이 맞아야 가능한 운용이었다. 판옥선과 거북선, 포격, 지휘 신호가 한 장면에서 맞물렸다. 전술은 배와 사람을 정확한 위치에 놓는 기술이었지, 외침이 아니었다.
그 판단 앞에는 정보가 있었다. 이순신은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서 목동 김천손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이튿날 한산섬 앞바다에서 이를 직접 확인한 뒤에야 싸움터를 정했다. 좁은 물목 대신 넓은 바다, 정면충돌 대신 유인. 장소를 고르는 것부터가 전술이었다.
이순신의 전쟁사는 신화로 소비되기 쉽다. 그러나 한산은 개인의 용맹이 아니라 함대 운용과 보급 판단이 만든 승리였다. 지형 이해, 정보 판단, 부하와 물자의 관리가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매일 써 내려간 『난중일기』는 바로 그 판단의 흔적을 담은 기록이다.
■ 왜 지금 이순신을 다시 읽나
한산의 무게는 그날 하루에 그치지 않았다. 5년 뒤 명량에서, 그리고 마지막 노량에서 이순신은 무너진 조건 속에서도 수군을 다시 세웠다. 그는 전투만 이긴 장수가 아니라 흩어진 조직을 재건한 지휘관이었다. 익숙한 구국 서사를 다시 읽는다면 찬양의 문장을 되풀이하는 데서 멈출 수 없다. 한산도, 견내량, 학익진, 보급로를 함께 놓을 때 그의 리더십은 추상이 아니라 현장의 판단으로 드러난다.
오늘 한산을 기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순신의 이름이 오래 남은 것은 그가 용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판단이 전투 이후의 흐름까지 바꿨기 때문이다. 한국 독자에게 이 장면은 영웅담이 아니라 조직을 움직인 판단의 힘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