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 국군 최초 대장,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라/ 정권마다 지워지고 복원되는 현충원 기록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3년 1개월을 끌어온 6·25전쟁의 총성이 멎었다. 정전협정 조인식에는 유엔군과 북한, 중국 대표가 마주 앉았다. 한국 대표의 서명은 없었다. 휴전에 반대한 이승만 정부는 협정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 2년간의 휴전 협상 테이블에 한국군을 대표해 앉았던 인물이 백선엽이다.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지켜낸 국군 최초의 대장. 그러나 정전 73주년을 맞은 지금, 그의 이름 앞에는 상반된 두 호칭이 함께 붙는다. ‘구국의 영웅’과 ‘친일반민족행위자’다. 하나의 삶에 담긴 이 모순이야말로 한국 현대사가 아직 풀지 못한 숙제다.
◇ 32세에 별 넷, 그 이전의 만주
백선엽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하다 1945년 광복을 맞았다. 이후 월남해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6·25전쟁이 터지자 제1사단장으로 참전했다.
1953년 1월, 만 32세에 국군 최초의 대장에 올랐다. 육군참모총장을 두 차례 지냈고, 예편 뒤에는 교통부 장관과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거쳤다. 2020년 7월 99세로 별세했다. 그를 한 줄로 정의하면 ‘창군과 전쟁, 그리고 식민의 그림자를 한 몸에 지닌 군인’이다.
◇ 다부동, 낙동강 최후의 보루
백선엽의 이름을 역사에 새긴 건 1950년 8월 다부동 전투다. 대구 북방 다부동은 낙동강 방어선의 마지막 빗장이었다. 이 선이 뚫리면 임시수도 대구가, 나아가 부산이 위태로웠다. 제1사단을 이끈 백선엽은 후퇴하는 병사들 앞에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고 외쳤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그는 앞장서 고지로 향했다. 사투 끝에 방어선은 지켜졌고,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전공으로 백선엽은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평양 탈환 작전에도 참여했다. 미군은 그를 깊이 신뢰했다. 2013년 한미동맹 60주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백선엽 한미동맹상’이 제정됐다. 2020년 별세 당시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 전직 주한미군사령관들이 잇따라 애도 메시지를 냈고, 일부는 그를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라 불렀다.
◇ 지워졌다 되살아나는 네 글자
그러나 같은 이름 위에는 국가의 공식 기록이 겹쳐 있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백선엽이 1941~1945년 만주국군 장교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명단에 올렸다. 그가 복무한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한 부대였다.
다만 그가 직접 독립군을 토벌했는지는 논쟁이 있다. 복무 시기 만주에는 광복군이 대부분 흩어진 뒤였다는 반론과, 부대 자체가 한인이 포함된 동북항일연군을 상대한 명백한 친일 조직이었다는 지적이 맞선다.
기록은 정권에 따라 지워지고 되살아났다. 2019년 문재인 정부 보훈처는 현충원 안장 기록에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명시했다. 2023년 윤석열 정부 국가보훈부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이를 삭제했다. 박민식 당시 보훈부 장관은 “백 장군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데 장관직을 걸겠다”고 했다. 이에 광복회는 “원상복구하라”며 반발했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 기억을 둘러싼 전쟁
백선엽을 어디에 묻을지도 다툼이었다. 2020년 유족은 대전현충원을 택했다. 보수 진영은 ‘전우들이 잠든 서울현충원에 모셔야 한다’며 홀대를 주장했고, 반대편은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국립묘지 안장 자체에 반대했다.
정전 73주년의 지금도 이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전체제 아래 안보의 상징으로 그를 기리려는 시선과, 청산되지 못한 식민 유산을 그에게서 확인하려는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한 인물의 기록이 정권마다 지워지고 복원되는 현상 자체가, 한국 사회가 전쟁의 기억과 과거사를 아직 하나의 언어로 정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오늘, 이 사람] 백선엽](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d/Generak_Baek_Seon-yeop.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