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초록병에 담긴 700년 욕망

몽골군의 증류 기술에서 희석식 소주, 세계 1위 증류주까지
소주는 어떻게 한국인의 위로이자 가장 대중적인 술이 됐나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느날, 우울한 표정의 기훈(이정재 역)이 서울 변두리 작은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친구에게 어머니 수술비를 빌리러 갔다가 거절 당한 직후입니다. 고개를 푹 숙인채 암담한 표정으로 1회용 플라스틱 소주잔만 쳐다보고 있는데, 며칠전 서바이벌 게임장에서 만났던 일남(오영수 역)이 다가옵니다. “자네! 맞지? 456번”, “아! 네 맞습니다.” 기훈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앉으시라 권합니다. “영감님을 여기서 다 뵙네요. 아, 한잔 하시겠어요? 소주잔을 건내는 순간 강술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떠오릅니다. “안주가 없어서 어떻하죠?” 일남은 멋적은 듯 가방에서 라면봉지를 꺼냅니다. 둘은 스프를 뿌린 생라면을 안주 삼아 번갈아가며 소주를 들이킵니다. “나 다시 가기로 했어. 밖에 나와보니까, 그 사람들 말이 다 맞더라구. 여기가 더 지옥이야!” 기훈은 부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아무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소주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갑니다.
‘넷플릭스’ 역대 최고 시청시간 기록을 세운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입니다.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장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이 현실의 참담함을 다시 느끼고, 서바이벌 게임장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하는 순간입니다.

‘서민의 술’
소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지치고 힘들때 자기 위로의 수단이 되고, 때로는 동료들과 공감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현실이 더 지옥이라는 일남의 말에 아무런 대꾸없이 소주잔을 들이키는 기훈의 모습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공감의 표현입니다.
소주는 한국에서 ‘서민의 술’이란 이미지가 강합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때문입니다. 1960년대 이후 빠른 경제성장 과정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의 고단함을 달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한국의 편의점에서 소주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입니다. 연중 판매량 1위를 놓치지 않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혼술 문화가 확산하면서 소주 판매량은 더 늘었다고 합니다.
치열한 경쟁에 치인 직장인이나,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한 청년이라면 뉘였뉘였 해 지는 저녁 한잔의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습니다. 동료들과 삼겹살에 곁들이면 하루종일 시름도 사라집니다. 회식이 없어도 집앞 편의점에서 소주 1~2병을 사서 저녁 식사때 곁들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24시간 편의점에서 소주가 인기를 끄는 이유입니다.

몽골군이 전파해준 증류 기술
소주의 역사는 꽤 멀리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1276년 고려 충렬왕 시대, 몽골군이 일본 정복을 위해 보낸 대규모 군대가 안동의 한 마을에 주둔합니다. 한 호기심 많은 청년이 몽골 병사들이 마시는 이상한 음료를 몰래 훔쳐 마십니다. “으악!”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깜짝 놀라 겨우 한 모금 들이키고 맙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곧이어 이상하게 따듯한 기운과 묘한 황홀감이 찾아옵니다. “왜 이러지? 기분이 이상해!”
소주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 소주를 만드는 법을 전파한 건 몽골군입니다. 고려시대 우리나라를 침범한 몽골군 병참기지가 우리에게 증류주 기술을 전파한 루트였습니다. 안동, 제주, 진도, 제주. 우리나라 소주의 원류는 모두 몽골군 병참기지가 있었던 곳입니다.
몽골군은 1250년대 입바스조 이슬람 제국을 점령한후, 현지 농경민에게 배운 ‘증류주’ 양조법을 전세계에 퍼뜨립니다. 몽골군이 주둔한 전세계 주요 나라마다 현지에서 생산되던 ‘발효주’(과일이나 곡물이 발효하면서 만들어진 포도주, 맥주, 막걸리 등)를 이용해 증류주를 만드는 기술을 전파했습니다.
증류 기술은 발효주를 끓여 알코올을 뽑아내는 겁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물은 100도에서 끓고(증류하고), 알코올은 그보다 낮은 78도 전후에서 끓습니다. 일반적으로 막걸리를 끓이면 막걸리에 6% 정도 섞여 있는 알코올이 먼저 끓는 점에 도달해 ‘기화’가 일어납니다. 이를 ‘소줏고리’ 같은 증류기를 톻해 모으면 ‘소주’라는 증류주가 되는 겁니다. 증류기 원리는 간단해요. 주전자 뚜껑을 생각하면 됩니다. 먼저 끓어 오르는 액체가 뚜껑에 이슬처럼 맺히잖아요. 그걸 흐르도록 해서 모으는 겁니다. 증류해서 모아 놓은 액체의 알코올 도수는 매우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증류주에요.
이 기술을 활용해 유럽에선 포도 발효주인 와인으로 ‘브랜디(프랑스에선 ‘코냑’으로 유명하죠)’를, 보리 발효주인 맥주로는 ‘위스키’를 증류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쌀 발효주인 막걸리로 소주를 만든 거구요.
증류 기술 전파 과정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소주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가 유럽의 위스키나 브랜디가 시작된 시기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군을 꾸려 한반도의 안동, 제주도, 진도, 개성에 병참기지를 세웠던 13세기입니다. 몽골군이 주둔했던 지역에선 각각 안동소주, 개성소주, 제주도 고소리술, 진도 홍주가 태어났습니다. 이 증류주가 소주의 기원이 되는 술이죠.

최초의 기계식 소주 공장 ‘조선 소주’
고려시대 소주는 함부로 마실 수 없는 술이었습니다.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즐겼고 일반 서민들에게는 약용으로 사용돼 ‘약소주’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조선 시대 소주는 좀 더 대중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종실록’에는 허약한 단종에게 소주로 기운을 차리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성종 때는 서민에게 소주를 금지해야 한다는 논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백성이 곡식으로 소주를 만들어 마시는 게 사치이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는 청원을 놓고,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토론을 벌인 기록입니다.
소주의 대량생산은 일제시대 시작됐습니다. 1919년 평양에 최초의 기계식 소주 공장인 ‘조선소주’가 세워진 게 우리나라 상업 생산의 첫 출발입니다.

희석식 소주의 탄생
한국 소주 생산의 가장 큰 변화는 박정희 정부가 1965년 개정한 ‘양곡관리법’으로 시작됩니다. 이 법으로 쌀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알곡(곡물의 씨알)으로 술을 만드는 것이 금지됩니다. 가뜩이나 먹을 곡물이 부족한 마당에 술을 만들어 마시는 건 사치라고 본 겁니다.
이때부터 쌀막걸리는 생산되지 못했고, 소주도 증류식 소주에서 ‘희석식’ 소주로 대체됩니다. 희석식 소주는 처음 시작부터 쌀이 재료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희석식 소주는 앞서 설명한 증류식 소주와 달리 순도 95% 이상 식용 알코올에 물을 타서 만듭니다. 식용 알코올을 ‘주정’이라고 부르는 데, 대부분 서민용 술과, 조미료 등에 두루 쓰입니다. 주정의 원료는 옥수수, 고구마, 감자, 타피오카 등 저렴한 탄수화물이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우리나라 수입 농산물 중 타피오카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부분 주정의 원료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전세계 작물중 가장 싼 탄수화물이 타피오카이기 때문입니다.
타피오카로 어떻게 주정을 만들까요? 타피오카에 ‘엿기름’이나 침에 들어있는 성분인 ‘아밀라제’ 같은 성분을 섞어 끓이면 ‘당(sugars)’으로 바뀝니다. 탄수화물이 당으로 변하는 겁니다. 다이어트 하신 분들은 다 알죠. 탄수화물을 이루는 성분이 당과 식이섬유라는 것을요. 다이어트를 할때 탄수화물을 끊는 건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그런데 식용 알코올은 ‘효모’라는 미생물이 당을 소화하면서 내놓는 물질입니다. 효모가 당을 소화해 배설물로 알코올을 내놓는 거죠. 아, 많이 헷갈리는 데 효모는 술을 만들때 중요한 기능을 하는 ‘효소’와는 다릅니다. 탄수화물은 포도 등 과실류와 달리 술을 만드려면 당화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게 앞서 설명한 엿기름 같은 효소입니다.
효모는 알코올 발효를 하다가 알코올 도수가 15~20도까지 올라가면 멈춥니다. 그 이상 알코올 농도가 올라가면 미생물인 효모가 삼투압 작용으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알코올 20도 이상에선 미생물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술이 썪지 않습니다)
이 단계에서 마시는 술이 발효주입니다. 쌀로 발효주를 만들면 10도 이상 술이 만들어 지는데, 윗부분 맑은 술을 청주라고 하고, 밑에 남은 부분에 물을 부어 마시는 걸 막걸리라고 합니다. 요즘은 10도이상 막걸리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보리 발효주인 맥주가 수도권 맥주 등 10도이상이 있는 것처럼요.
곡류로 만든 발효주와 달리, 포도로 만든 발효주를 와인이라고 하고, 사과로 만들면 시드르(Cidre)라고 하는데요. 사이다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이 과실로 만든 발효주는 효소를 활용한 당화 과정을 거치진 않죠. 이미 그 자체에 당이 가득하니까요.

소주를 만드는 법
이 발효주를 끓여 증류주를 만든다는 건 앞서 설명했습니다. 주정하고 차이는 무엇일까요? 증류주는 증류 과정을 1~2회에서 멈춥니다. 원재료의 향이 살아 있도록요.
그런데 증류를 여러번 하면 어떻게 될까요? 증류해서 받아 놓은 걸 모아서 다시 증류하고, 그걸 모아서 또다시 증류하는 식으로요. 이 과정을 반복하면 알코올 도수를 95% 이상으로 높인 ‘식용 알코올’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게 주정입니다. ‘연속식 증류기’를 사용해서 도수를 100도 가까이 높인 식용 알코올을 만든 겁니다.
주정은 너무 독하고 써서 바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 자체로 술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주정엔 원재료의 향이 남아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에틸 알코올 성분만 남는 겁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회사는 대부분 2회 이상 증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킵니다. 원재료의 향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증류를 여러번 할 수록 원재료 향과 맛은 사라지겠죠.
희석식 소주는 원재료 향이 사라진 주정에 물을 섞고, ‘아스파탐’, ‘스테비오사이드’ 같은 단맛을 내는 감미료 등을 섞어 만듭니다. ‘화학식’ 소주라고 부르는 건 식용 에틸 알코올에 이런 저런 감미료를 섞어 만들었다는 걸 강조한 표현입니다. 감미료로 설탕을 쓰지 않는 건 비싸서 입니다. 아스파탐 같은 감미료는 설탕의 200배 이상 단맛을 내기 때문에 약간만 타도 효과적으로 주정의 쓴 맛을 없애줍니다. 훨씬 경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소주는 가장 싼 탄수화물로 식용 알코올을 생산해, 물과 각종 감미료로 블렌딩한 일종의 칵테일입니다. 그러니 2000원을 넘지 않는 저렴한 서민들의 술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지역 대표 소주 회사의 탄생
희석식 소주는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전국에 확산됩니다. 1974년 소주 한 병 가격이 100원 가량이었는데, 맥주는 238원이었다고 합니다. 소주가 ‘서민의 술’, ‘서민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죠.
박정희 정부는 1976년 주류회사 통폐합 정책을 폅니다. 이로써 각 도에 하나씩 10개의 희석식 소주 업체만 남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지역별로 대표 소주 브랜드가 만들어진 계기가 됐습니다.
‘참이슬’(수도권)과 ‘처음처럼’(강원)이 가장 많이 팔리는 소주로 성장했고요. ‘좋은데이’(울산 경남), ‘오투린’(대전 충남), ‘시원한청풍’(충북), ‘잎새주’(광주 전남), ‘하이트’(전북), ’맛있는 참’(대구 경북), ‘C1’(부산), ‘한라산’(제주) 등이 현재까지 소비되고 있습니다.
쌀로 만든 발효주를 증류한 제대로 된 ‘증류식’ 소주는 1990년대 이후 상업적으로 본격 판매됩니다. 쌀 생산량이 급증해 쌀로 증류주를 만드는 걸 더이상 금지할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증류식 소주는 1991년부터는 암묵적으로 허용됐고, 1995년부터는 양곡관리법이 개정돼 공식적으로 허용됐습니다. 이로써 1965년 주류 시장에서 퇴장당했던 증류식 소주가 다시 시장에 등판합니다.
1999년부터 안동, 진도 등에서 다시 쌀로 소주를 생산하기 시작했고요. 2000년대 이후 ‘화요’가 나타났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품진로’ 등 여러 전통 증류주가 팔리기 시작합니다
2000년 이후 한국의 소주시장이 크게 성장한 건 소주의 대중화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합니다. 알코올 도수를 25도에서 16도까지 낮춰 젊은 여성 수요자를 대거 끌어들였구요. 편의점을 통해 술을 구매할 수 있는 접근성도 크게 개선됐습니다.

전세계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
몽골군이 고려에 증류기술을 전파한지 700여년이 지난 지금 소주는 한국인은 물론 전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술이 됐습니다. 관세청에 따르면 2024년 소주류 수출은 전년보다 3.9% 늘어난 2억 달러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역대 최대치로 2020년(1억3500만달러) 이후 4년 만에 1.5배로 늘어난 겁니다. 수출하고 있는 나라는 95개국이나 됩니다.
‘진로’는 세계 최대 증류주 브랜드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이트진로는 2024년 ‘진로’ 수출이 약 9680만 상자(상자당 9ℓ)나 팔려 24년 연속 글로벌 증류주 판매 1위를 기록했다고 밝혔습니다. 2위 브랜드 판매량보다 두배 이상 많은 압도적 1위입니다. 한 상자에 360ml 30병이 들어 있으니 29억병이 넘습니다.
진로 외 무설탕 소주를 내세운 ‘새로’ 등 다른 소주 수출량까지 따지면 연간 40억병이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독주보다는 순하면서도 적은 양을 마시고도 취할 수 있는 소주의 매력을 알아채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건데요. K-드라마나 K-무비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초록색 병’에 호기심이 생긴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전세계 소주 판매량은 계속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소주는 이제 한국을 넘어서 세계의 대표적인 증류주로 거듭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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