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두 회사 때문에 세계 증시가 한국을 본다
좋을 때 같이, 나쁠 때도 같이 흔들리는 구조
서울 증시가 마감하기도 전에 뉴욕 트레이더들이 코스피 창을 켠다. 월가에서 생긴 새로운 아침 루틴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한국 증시가 뉴욕 증시 개장 전 위험 신호를 미리 보여주는 지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 밀착도를 숫자로 보여주는 지표가 있다. 코스피와 나스닥100지수의 상관계수, 0.46이다.
◇ 왜 지금 ‘상관계수 0.46’이 화제인가
상관계수는 두 지수가 일정 기간 얼마나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는지 보여주는 통계값이다. 1에 가까울수록 동조화가 강하고, 0에 가까울수록 무관하다는 뜻이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코스피와 나스닥100지수의 60일 상관계수는 0.46으로, 최근 2년 이내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 최근 5년 평균인 0.16의 약 3배에 달하는 수치다.
숫자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방향이다. 한국 증시 약세 국면에서 나스닥100지수가 코스피 움직임에 반응하는 민감도는 지난 7일 기준 199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상승했다.
배경엔 고대역폭메모리(HBM, AI 반도체 연산에 필요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고성능 메모리) 시장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AI 생태계의 핵심 공급업체로 떠오르면서다.
◇ 한국이 ‘이끄는’ 걸까, ‘같이 흔들리는’ 걸까
여기서 짚어볼 지점이 있다. 두 지수가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과, 한쪽이 다른 쪽을 이끈다는 건 다른 얘기다.
쌍둥이 시계 두 개가 같이 간다고 한쪽이 다른 쪽을 조종하는 건 아니다. 같은 태엽공이 맞춰놨을 수도 있다. 코스피와 나스닥이 함께 움직이는 것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가 같은 AI 반도체 뉴스에 동시에 반응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시장 참가자의 행동은 달라졌다. 티그리스파이낸셜파트너스의 이반 파인세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한국이 사실상 나스닥과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의 변동성 생태계에 편입됐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코스피가 미국 AI·반도체 투자 위험을 장 시작 전에 보여주는 지표가 됐다는 것이다.
런던의 한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이제 우리는 모두 한국 투자자라며 매일 아침 한국 증시를 살펴 AI 투자 심리를 파악한다고 말했다. JP모건 아시아 수석 시장전략가도 14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시장을 주제로 사내 브리핑을 열었다.
◇ 급락이 증명한 ‘반도체 리스크’
‘영향력’이 부각된 시점은 하필 급락과 겹쳤다. 16일 코스피는 전날보다 6.37% 떨어진 6820.60에 거래를 마쳤다. 삼성전자는 8.77% 내린 25만5000원, SK하이닉스는 11.53% 하락한 184만2000원에 장을 마쳤다.
이날 코스피200선물 지수가 5% 이상 떨어지며 매도 사이드카(프로그램 매도 주문을 일시 정지하는 안전장치)가 발동했다. 올해 들어 37번째다.
블룸버그는 한국 증시 영향력이 커지는 데 따른 부작용도 짚었다. 코스피가 세계 주요 지수 중 가장 변동성이 큰 지수가 됐고, 레버리지(빚을 내 하는 투자) 거래가 주가 변동을 더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안정적 리더십인지, 일시적 흔들림인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 남은 변수는 무엇인가
분명한 건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실적과 주가는 더 이상 국내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두 회사가 흔들리면 미국·일본 반도체주까지 같이 흔들리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반대로 한국 증시도 미국 AI 반도체 경기에 그만큼 더 민감해졌다. AI 투자 열기가 이어지는 동안은 같이 오르겠지만, 식으면 한국이 그 충격을 더 크게, 더 먼저 받을 수 있다.
관건은 다음 실적 시즌에서 HBM 수요 둔화 우려가 얼마나 해소되느냐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한 만큼, 한국도 세계 AI 경기의 온도 변화를 더 예민하게 느끼게 됐다. 그 예민함이 기회가 될지 부담이 될지는 다음 AI 투자 사이클이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