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얼음’이 필요한 시대 — 냉장고는 어떻게 편의점을 만들었나

한밤중, 도시의 정적을 깨고 편의점 간판이 알록달록 빛납니다. 문을 열면 가장 먼저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음료 냉장고가 눈에 들어옵니다. 콜라와 사이다부터 이온음료, 주스, 에너지 드링크까지 색색의 음료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손길을 기다립니다. 반대편 벽에는 김밥·도시락·샌드위치·샐러드가 길게 늘어선 오픈형 냉장고가, 매장 한가운데에는 아이스크림과 냉동만두·냉동피자를 품은 냉동고가 자리합니다. 한여름 더위에 지친 행인에게, 야근을 마친 직장인에게 이 차가운 진열대는 작은 오아시스입니다.

너무 익숙해서 우리는 잊고 삽니다. 24시간 멈추지 않고 차가움을 지키는 이 모든 시설이, 실은 단 하나의 기술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요. 바로 냉장입니다. 냉장고가 없었다면 편의점이라는 공간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편의점, 한국이 만든 가장 편리한 시스템

편의점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쇼핑 시스템입니다. 1989년 첫 점포가 문을 연 뒤, 2024년 기준 4대 편의점(CU·GS25·세븐일레븐·이마트24)의 점포 수는 5만 5000개를 넘어섰습니다. 인구당으로 따지면 940명에 한 곳꼴로, ‘편의점 왕국’ 일본(2180명당 한 곳)을 두 배 이상 앞지른 세계 최고 밀도입니다. 2020년 이미 대형마트 매출을 넘어섰고, 2024년엔 전체 유통업체 매출의 17.3%를 차지하며 백화점을 코앞까지 따라잡았습니다.

비결은 ‘극도의 편리함’입니다. 집 앞 골목에서, 새벽 3시에도, 갓 만든 듯한 도시락과 차가운 음료,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습니다. 전체 가구의 35%가 1인 가구인 시대에, 편의점은 누군가에겐 냉장고이자 부엌이자 식료품점입니다. 그런데 이 편리함의 한복판에는 늘 ‘차가움’이 있습니다. 신선식품도, 즉석식품도, 음료도, 냉장 없이는 단 하루도 진열대에 둘 수 없습니다. 편의점의 역사는 곧 냉장의 역사인 셈입니다.

얼음, 사치품이었던 시절

찬 곳에서 음식이 오래 간다는 걸 고대인도 알았습니다. 그리스인은 산에서 가져온 눈으로 와인을 식혔고, 중국 주나라에는 제사에 얼음을 쓸 만큼 권세 있는 집안을 가리키는 ‘벌빙지가(伐氷之家)’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얼음은 값비싼 유행 상품이었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은 1808년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 “얼음을 먹고 프랑스 와인을 마시겠다”고 썼습니다. 얼음이 곧 사치였던 시대의 풍경입니다.

이 얼음을 사업으로 바꾼 인물이 있습니다. 1806년, 23세의 보스턴 사업가 프레데릭 튜더는 뉴잉글랜드 호수의 얼음을 카리브해 식민지로 실어 나릅니다. 톱밥으로 단열한 배에 얼음을 싣는 기술로, 그는 1833년 인도, 1845년 홍콩까지 얼음을 보냈습니다. 첫해 130톤이던 수송량은 50년 뒤 1000배가 넘는 14만 6000톤으로 불어났습니다. 항구마다 저온 창고를 세운 그는 ‘얼음 왕(Ice King)’으로 불렸습니다. 오늘날 편의점 진열대를 채우는 콜드체인(저온 유통)의 먼 조상인 셈입니다.

인공 얼음을 향한 경쟁

자연 얼음만으로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과학자들은 인공으로 얼음을 만드는 길을 찾았습니다. 18세기 영국 글래스고대학의 윌리엄 컬런은 액체가 기체로 변할 때 주변 열을 빼앗는다는 사실에 주목해, 에테르로 작은 얼음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냉매’의 발견이었습니다.

이 원리를 체계화한 사람이 미국의 올리버 에반스입니다. 그는 1805년 증기압축식 냉각 사이클을 처음 설계했습니다. 다만 도면에 머물렀을 뿐, 실제 기계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구상을 현실로 옮긴 이는 동료 제이콥 퍼킨스였습니다. 퍼킨스는 1834년 8월 14일 ‘얼음을 만드는 장치’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받았는데, 이것이 연속해서 작동하는 최초의 증기압축 냉각기이자 현대 냉장고의 원형입니다. 상업화의 문을 연 건 스코틀랜드 태생 호주인 제임스 해리슨입니다. 그는 1855년 에테르 냉매를 쓴 냉장고를 만들어 산업용으로 팔았고, 그래서 ‘냉장고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가정으로, 그리고 가게로

1876년 독일의 칼 폰 린데는 암모니아를 쓴, 더 작고 효율 높은 냉각기를 내놓습니다. 처음 무대는 양조장·도축장·냉장창고 같은 산업 현장이었습니다. 여름에도 맥주를 빚게 해준 린데의 기계는 유럽 식품산업을 통째로 바꿨고, 훗날 가정용 냉장고로 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가정용 전기냉장고는 1913년 미국의 프레드 울프가 처음 만들었지만 소음과 부피 탓에 외면받았습니다. 진짜 대중화는 1927년 제너럴일렉트릭(GE)의 ‘모니터 탑’에서 시작됩니다. 소음을 줄이고 디자인을 다듬어 냉장고를 ‘주방의 가구’로 만든 제품이었죠. 대공황 이후 중산층의 구매력이 살아나면서, 1950년대엔 미국 가정의 80% 이상이 냉장고를 갖게 됩니다. 한국은 1965년 금성사(현 LG전자)가 첫 국산 냉장고 ‘눈표’를 내놓으며 출발했습니다. 값이 8만 600원, 대졸 초임을 웃돌아 아무나 살 수 없었지만, 1970년대 경쟁으로 값이 내리며 1986년 보급률은 95%에 이릅니다.

이윽고 냉장고는 가정의 부엌을 넘어 가게의 진열대로 옮겨 갑니다. 음료 냉장고, 신선식품을 담는 오픈형 진열 냉장고,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차례로 매장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24시간 편의점이 가능해졌습니다. 편의점이란 어찌 보면 ‘걸어서 닿는 거대한 냉장고’인 셈입니다.

식탁을 바꾸고, 북극을 녹이다

냉장 기술은 식생활을 통째로 바꿨습니다. 사시사철 전 세계 식재료를 구할 수 있게 됐고, 매일 장을 볼 필요가 사라졌습니다. 가사 노동이 줄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앞당겼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냉동식품·유제품·아이스크림 같은 새로운 산업이 태어났고, 그 끝에 24시간 편의점이라는 한국적 풍경이 놓였습니다.

하지만 이 편리에는 그늘이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가 늘고, 멈추지 않는 냉장은 막대한 전기를 삼킵니다. 식품을 차갑게 보관하는 데 드는 에너지와 냉매는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2%를 넘습니다. 식량을 지키려 만든 ‘인공 북극’이 진짜 북극을 녹이는 역설입니다. 오늘 밤도 편의점의 불빛과 냉기는 꺼지지 않습니다. 그 차가운 편리함을 어떻게 덜 미안하게 누릴 것인가. ‘지속 가능한 차가움’이 우리에게 남겨진 다음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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