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의 4박5일, 한국 산업의 무게를 잰다

GTC 타이베이 직후 방한…재계 총수 6명 연쇄 회동

피지컬 AI 시대, 한국 제조 데이터가 핵심 자원으로

삼각동맹(엔비디아·SK하이닉스·TSMC) 공고화 가속

기회와 동시에 ‘플랫폼 소작농’ 전락 우려도

1조 달러.

엔비디아 시가총액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회사 CEO가 5일 오후 김포공항에 전용기로 내린다. 목적지는 성수동 삼겹살집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에 온다. 지난해 10월엔 하루였다. 이번엔 나흘이다.

체류 기간이 4배 늘었다는 건, 용건도 4배 커졌다는 뜻이다.


지난해와 올해의 차이

지난해 ‘깐부 회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강남 치킨집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과 나란히 앉은 장면. 그것이 전부였다. 이재용, 정의선과 만나고 돌아갔다.

이번엔 다르다. 최태원 SK, 정의선 현대차, 구광모 LG, 이해진 네이버 의장을 한 테이블에 불러모은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박정원 두산, 장병규 크래프톤까지 잇달아 만난다. 서울대 AI 연구소를 찾고, 국내 로봇·AI 스타트업과도 간담회를 연다. tvN 예능에 출연하고, 잠실야구장에서 시구도 한다.

7개월 전엔 반도체 얘기를 하러 왔다. 이번엔 한국 산업 전체를 훑으러 온다.


왜 한국인가

젠슨 황은 대만 GTC 타이베이 2026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AI는 이제 소프트웨어를 생성하는 단계를 넘어 공장과 로봇, 자동차를 움직이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가 꿈꾸는 다음 단계는 ‘피지컬 AI(Physical AI)’다. 채팅창 안에 갇힌 AI가 아니라, 공장 바닥을 달리고, 도로를 주행하고, 물건을 집어드는 AI다.

문제는 미국에 공장이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 공장, 반도체 팹(생산 시설), 중공업 현장, 로봇 라인. 피지컬 AI를 실제로 훈련시키려면 제조 현장의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 데이터가 한국에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산업용 로봇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다. 자동차, 반도체, 가전, 철강, 조선. 고밀도 제조업이 집중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다. 그 나라가 한국이다.

젠슨 황이 4박5일을 쓰는 이유다.


삼각동맹이 더 단단해진다

이번 방한 직전,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대만에서 젠슨 황과 먼저 만났다. 그 다음날엔 웨이저자 TSMC 회장을 찾아갔다. 2024년 6월 이후 2년 만의 회동이었다.

엔비디아·SK하이닉스·TSMC. 이른바 ‘AI 삼각동맹’이다. 엔비디아가 AI 반도체(GPU)를 설계하면, SK하이닉스가 GPU 옆에 붙는 고대역폭메모리(HBM·High Bandwidth Memory)를 공급한다. TSMC는 이 둘을 첨단 패키징 기술로 붙여 최종 AI 가속기를 만든다.

HBM이란 쉽게 말해 GPU의 ‘단기 기억’이다. 연산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기억이 따라오지 못하면 소용없다. AI 가속기에서 HBM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 삼각동맹이 6세대 HBM4부터 더 촘촘해졌다. SK하이닉스의 HBM4 베이스 다이(스택 맨 아래 칩)를 TSMC 12나노 공정으로 만든다. 세 회사가 한 제품 안에 더 깊이 얽혔다. 최 회장의 대만 연쇄 회동이 단순 친교가 아닌 이유다.

젠슨 황은 컴퓨텍스 2026 행사장에서 SK하이닉스 부스에 전시된 HBM4E 웨이퍼에 친필로 “제발 더 만들어줘”라고 적고 사인을 남겼다. 농담 같지만 진심이다. 골드만삭스는 HBM을 포함한 AI 메모리 공급 부족이 최소 2028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봤다.


공장이 AI를 만나는 현장

이번 방한 일정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젠슨 황이 LG트윈타워와 현대차 양재 사옥을 직접 찾는다는 것이다.

LG는 생산 공장을 AI 스마트팩토리로 전환하는 작업을 엔비디아와 진행하고 있다. LG이노텍(3D 센싱 모듈), LG AI 연구원(로봇용 AI), LG에너지솔루션(배터리)이 각자의 역할을 맡는다.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냉각 설비도 LG전자가 공급한다. 1.4메가와트(MW) 용량의 고효율 냉각 분배 장치가 미국 AI 데이터센터에 납품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품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가 양산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가상 시뮬레이션에서 수만 번 연습시킨 뒤 실제 로봇에 적용하는 ‘심투리얼(Sim2Real)’ 방식이 핵심 기술이다. 이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컴퓨팅 파워가 엔비디아 제품이다.

두산로보틱스는 이미 엔비디아 시뮬레이션 도구로 물류 로봇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 4월엔 젠슨 황의 딸이 두산로보틱스 연구소를 방문했다. 방문에 앞서 사전 답사를 다녀간 셈이다.


게임사가 로봇을 만든다

의외의 만남도 예정돼 있다. 크래프톤이다.

‘배틀그라운드’ 만드는 게임사가 왜 젠슨 황을 만나나. 크래프톤은 올해 초 피지컬 AI 전문 법인 ‘루도 로보틱스’를 설립했다. 휴머노이드 로봇 AI 개발에 뛰어든 것이다.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 이강욱 최고AI책임자(CAIO)가 만남 테이블에 앉는다.

게임 AI와 로봇 AI는 사실 가깝다. 가상 공간에서 물리 법칙을 시뮬레이션하는 기술이 핵심이다. 게임 엔진이 로봇 훈련 플랫폼으로 전환되는 흐름이 이미 글로벌 업계에서 시작됐다.

네이버는 ‘소버린 AI(Sovereign AI·주권 AI)’로 승부한다. 소버린 AI란 구글·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미국 빅테크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어·자국 데이터로 운영하는 독자 AI 인프라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엔비디아의 블랙웰 가속기 4,000개 이상을 확보했다. 일본, 중동, 동남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소버린 클라우드 사업이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기회와 위험 사이

모든 게 장밋빛은 아니다.

반도체 업계에선 중국 창신메모리(CXMT)의 부상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창신메모리는 최근 상하이 STAR 마켓 상장 승인을 받으며 막대한 자본을 조달했다. 예상 시가총액은 444조 원이다.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로 최첨단 공정은 불가능하지만, 범용 D램 시장에선 한국 기업 대비 50% 이하 가격으로 덤핑 공세를 펼치고 있다.

더 근본적인 우려도 있다. 한국 제조업의 데이터와 인프라를 엔비디아 플랫폼에 연결하는 것이 최적인가 하는 질문이다. 엔비디아의 시뮬레이션 환경인 ‘아이작(Isaac)’과 ‘옴니버스(Omniverse)’ 안에서만 구동되는 로봇을 만들다 보면, 핵심 데이터의 소유권과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가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플랫폼 소작농’ 우려다. 반도체를 납품하고, 공장 데이터를 제공하고, 로봇 하드웨어를 만들지만 핵심 설계 권력은 캘리포니아에 있다는 구조가 고착될 수 있다.

골드만삭스는 삼성전자 목표주가 48만 원, SK하이닉스 목표주가 350만 원을 제시했다. 낙관적이다. 그러나 경제 전반을 보면 반도체·AI 호황의 온기가 내수로 확산되지 않는 ‘K자형 회복’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야구장까지 간다는 것의 의미

젠슨 황은 7일 잠실야구장 마운드에 오른다. 93번이 새겨진 두산베어스 유니폼을 입는다. 엔비디아 창립 연도인 1993년을 뜻한다.

대만에서 야시장을 걸었고, 중국에서 길거리 음식을 먹었고, 한국에선 삼겹살을 먹고 예능에 나온다. 대만 언론은 이를 “세심하게 설계된 야시장 외교”라고 불렀다. 반도체 얘기는 어렵다. 야시장 얘기는 쉽다. 모두가 이해하는 공통 언어로 엔비디아를 각인시키는 전략이다.

젠슨 황은 기자들이 “한국에서 어떤 기업을 만날 것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치킨집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어로 “삼계탕”을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게 치킨집이라는 말은 물론 농담이다. 하지만 그 농담 뒤에 어떤 진심이 있는지, 한국 산업계는 나흘 동안 확인하게 된다.

모건스탠리는 글로벌 피지컬 AI 로보틱스 시장이 2050년까지 5조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이 그 시장의 핵심 제조 기지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데이터와 인프라를 제공하는 하청 기지로 남을 것인지.

젠슨 황의 방한이 답을 알려주진 않는다. 다만 질문을 선명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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