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 서거 72주기…1950년 상상한 기계가 2025년 현실이 됐다
72년이 지났다. 기계는 마침내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2025년, UC 샌디에이고 연구팀은 AI 언어 모델 GPT-4.5가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GPT-4.5는 73%의 성공률로, 실제 인간 참가자보다 더 인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기준을 설계한 사람이 1954년 6월 7일,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앨런 매시슨 튜링(1912~1954)은 잉글랜드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다. 알고리즘과 계산 개념을 ‘튜링 기계’라는 추상 모델로 형식화해 컴퓨터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케임브리지대 킹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폰 노이만이 직접 조교 자리를 제안했지만, 거절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을 위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나치 독일은 ‘에니그마’라는 암호 기계로 군사 통신을 철저히 암호화했다.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암호였다. 튜링은 달랐다. 그는 1939년 영국 암호 해독 기관 GC&CS에서 에니그마 해독 세션 책임자를 맡아 ‘튜링 봄브(Turing Bombe)’를 개발하고, 에니그마를 해독했다. 에니그마 해독은 독일을 위축시켰다. 전문가들은 그 공로만으로 전쟁을 2년 정도 앞당겨 끝내고 약 1400만 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단, 이 사실은 기밀이었다. 일반에 공개된 건 그가 죽고 20년이 지난 후였다.
전쟁이 끝났다. 튜링은 다시 수학자로 돌아갔다. 맨체스터대학교에서 초기 디지털 컴퓨터 ‘맨체스터 마크1’ 개발에 참여했고, 1950년에는 철학 저널 ‘마인드(Mind)’에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을 발표했다. 논문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는 지능의 본질에 대한 논쟁을 잠시 내려놓고, 대신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를 ‘지능의 기준’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튜링 테스트’다. AI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 그는 AI의 판별 기준을 먼저 만들었다.
1952년, 튜링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아널드 머레이라는 남성의 관계를 솔직하게 진술했다. 동성애 관계라는 게 외부에 알려졌다.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다. 외설 혐의로 기소됐고, 모든 기밀 업무에서 배제됐다. 미국 출국도 제한됐다.
외설죄로 그는 수감형 또는 화학적 거세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거세를 택했지만, 그 영향으로 신체가 여성화되는 부작용을 겪었다. 에니그마를 깨뜨린 수학자는 그렇게 세상과 멀어졌다.
1954년 6월 7일, 자택에서 41세로 사망했다. 유서는 없었다. 당시 영국 언론의 부고 기사는 단 한 줄이었다. “천재 과학자의 비참한 죽음.”
컴퓨터 과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튜링상’은 1966년부터 수여되고 있다. 영국 중앙은행은 그를 50파운드 최고액권 지폐의 인물로 선정하며,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의 아버지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2009년 고든 브라운 총리는 그에게 공식 사과했다. “그는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사망한 지 59년 만이었다.
튜링이 죽고 72년이 흘렀다. 챗GPT가 대화하고, 알파고가 바둑을 두고,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린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에 한 수학자의 질문이 있었다.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1950년 이 질문이 현실을 만들었다. 그것만으로 그 질문을 처음 던진 사람을 기억할 이유가 충분하다.
![[오늘, 이 사람] 앨런 튜링](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4/40/Alan_Turing_%281912-1954%29_in_1936_at_Princeton_University_%28cropped%2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