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도 부러워한 한국만의 제도
부동산 정책이 전세를 끝낼 수 있을까
2019년 봄, 서울 신촌.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부동산 중개업소에 들렀다. 연세대 국제학부에 입학한 큰아들이 살 집을 구하러 왔다. 그가 고른 건 전세 아파트였다.
졸리는 계약서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월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 보증금만 맡긴다. 2년 뒤 그 돈을 그대로 돌려받는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방식이다. 전세는 대한민국에만 있다.
그 무렵 파주 국가대표팀을 이끌던 파울루 벤투 감독도 일산의 전세 아파트에 살았다. 대한축구협회는 전세로 외국인 감독단의 주거비를 크게 아꼈다.
외국인이 신기해하던 제도. 그 전세가 지금 ‘적폐’로 몰렸다.
2026년 6월 8일, 청와대 영빈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전세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일종의 사금융인데, 조금씩 사라져가지 않겠나.”
발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세대출을 많이 풀어준 게 집값 상승의 주된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니 전세가 줄어드는 건 ‘정상화 과정’이라는 진단이다. 정부는 전세 소멸을 시장 구조가 바로잡히는 신호로 본다.
시장은 이미 기울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서울 아파트 신규 임대차 계약 5만1196건 가운데 월세가 2만7719건이다. 비중 54.1%. 2023년 43%였던 월세 비중이 3년 만에 절반을 넘겼다. 신규 계약 둘 중 하나가 월세다.
월세값도 뛴다. 전국 월세가격지수는 4월 105.5로 역대 최고를 찍었다. 빌라·다세대는 더 가파르다. 올해 서울 비아파트 임대차의 월세 비중은 78.7%, 역시 사상 최고다. 월 100만원 넘는 빌라 월세 계약이 1년 새 28.9% 늘었다.
전세 매물은 말랐다. 지난해 6월 2만5000건이던 서울 전세 물량이 올해 5월 1만6000건 아래로 떨어졌다. KB부동산 서울 전세수급지수는 182.67. 2020년 12월 이후 5년 5개월 만에 180을 넘었다. 전세를 찾는 사람이 매물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뜻이다.
그 결과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70주 연속 올랐다.
전세 종말론은 새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전세 시대는 추억이 될 것”이라고 했다. 2023년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은 “전세 제도가 수명을 다했다”고 했다. 2013년 국토연구원장이던 김경환 교수도 “전세 시장 소멸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봤다.
그런데 이 발언들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집값 하락기에 나왔다.
전세는 집값 상승을 먹고 사는 제도다. 집주인이 5억원짜리 집을 사 3억원에 전세를 놓는다. 나머지 2억원은 살지도 않는 집에 묶인다. 세금과 유지비까지 떠안는다. 그런데도 전세를 놓는 이유는 하나, 시세 차익에 대한 기대다. 집값이 오를 거란 믿음이 꺼지면 집주인은 전세를 거둔다. 매달 돈이 들어오는 월세로 돌린다. 그래서 종말론은 늘 침체기의 단골 메뉴였다.
이번엔 정반대다. 집값이 70주째 오르는데 전세가 사라진다.
시장이 죽인 게 아니다. 정책이 죽이고 있다.
핵심은 ‘부동산과 금융의 절연’이다.
정부는 가계부채를 GDP 대비 89%에서 2030년 80%로 낮추겠다는 로드맵을 세웠다. 부동산으로 흘러드는 돈줄을 끊는 게 목표다.
지난해 6·27 대책이 신호탄이었다. 수도권·규제지역의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을 금지했다. 전세대출 보증 비율을 90%에서 80%로 낮췄다. 2주택 이상 다주택자의 추가 대출 한도(LTV)는 사실상 0이 됐다. 여기에 비거주 1주택자(갭투자자)의 전세대출 제한, 고액 전세자의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산입까지 검토 중이다.
빚으로 집 사는 길을 막으면 전세도 함께 마른다. 전세대출이 전세 수요를 떠받쳐 왔기 때문이다.
진단은 둘로 갈린다.
이 대통령은 전세난 자체를 의심한다. 다주택자가 양도세 유예 종료 전에 집을 팔았고, 그 집을 무주택자가 사서 들어갔으니 전세 수요도 그만큼 줄었다는 논리다. 공급이 준 만큼 수요도 줄었다는 1대1 치환이다. 그래서 “전세 물량이 부족해 폭등했다는 건 그런 상황을 원하는 사람들이 만든 논리”라고 했다.
전문가들의 반론은 두 갈래다.
첫째, 수요와 공급은 1대1로 나란히 줄지 않는다. 전세는 원래 구하는 사람이 집보다 많다. 그 상태에선 같은 수가 빠져도 경쟁이 더 세진다. 전셋집 10개에 세입자 15명이라고 하자. 집 5개와 세입자 5명이 함께 빠지면, 남는 건 집 5개에 세입자 10명이다. 한 채를 놓고 다투는 사람이 1.5명에서 2명으로 늘어난다. 1대1로 줄여도 전세난은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조인다.
둘째, 빌라 전세사기와 아파트 전세난은 다른 문제다. 이 대통령은 “집값이 1억원인데 전세가 1억2000만원”이라며, 보증금이 집값을 웃돌아 사기꾼에게 기회가 생긴다고 봤다. 하지만 이는 주로 빌라 얘기다. 서울 아파트 전세가율(집값 대비 전세금 비율)은 57.5% 수준이다. 전세금이 집값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다. 집값이라는 안전판이 두껍다. 보증금을 떼이는 깡통전세가 생기기 어려운 구조다. 아파트 전세난을 사기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정치권 반박도 거세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전세 소멸은 정상화가 아니라 서민 주거 사다리가 무너진 정책 참사”라고 맞받았다.
그렇다면 전세가 진짜 사라질까.
전문가 다수는 어렵다고 본다. 무엇보다 규모가 문제다. 한국경제연구원 추산으로 전국 전세보증금은 1058조원에 달한다. 집주인에겐 돌려줘야 할 빚이다. 이 목돈을 한꺼번에 빼서 월세로 갈아탈 여력이 있는 집주인은 많지 않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에스크로(보증금을 제3기관에 맡기는 신탁 제도)도 만능이 아니다. 정부는 이미 2016년 비슷한 상품을 내놨다. 이용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방향은 분명하다. 전세는 완전 소멸보다 점진 축소로 간다. 중저가 주택에서 먼저 빠지고, 고가 아파트엔 남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전세를 누르는 동안 공급이 비고 있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은 지난해 3만2370가구에서 올해 1만8880가구로 41.7% 급감한다.
변수가 하나 더 있다. 등록임대주택이다. 2017년 정부는 세금 혜택을 주며 집주인의 임대주택 등록을 유도했다. 대신 8년간 의무로 세를 놓아야 했다. 시세보다 싼 전세·월세 공급원 역할을 해온 물량이다. 그 의무 기간이 올해부터 줄줄이 끝난다. 서울에서만 올해 2만 가구가 넘는다. 의무가 풀린 집주인은 집을 팔거나, 전세를 월세로 돌린다. 싸던 전세 매물이 그만큼 더 마른다.
수요는 막고 공급은 비면, 오르는 건 월세뿐이다. 보유세가 오르면 임대인은 그 부담을 월세에 얹는다. 결국 청구서는 세입자에게 간다.
전세 종말론의 결말은 늘 같은 곳을 가리킨다. 집값, 그리고 공급이다.
정부가 전세를 없애는 게 아니다. 집값이 전세를 살리고, 또 죽인다. 정책이 시장보다 앞서 달릴수록, 두꺼워지는 건 세입자의 월세 고지서다.
졸리가 부러워하던 제도는 그렇게 저물고 있다. 다만,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게 더 나은 주거인지는 아직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