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사람] 독립의 상징은 왜 해방된 조국에서 총에 맞았나

백범 김구 1949년 경교장에서 피격…서거 77주기
한인애국단·임정·남북협상…’분단의 질문’을 남긴 인물

1949년 6월 26일 정오 무렵, 서울 경교장 2층 서재. 73세의 노인이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때 현역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가 면담을 청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백범 김구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광복의 순간까지 지켜온 독립운동의 상징이, 해방된 조국 한복판에서 자신이 이끌던 한국독립당 소속 군인의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장례식까지 열흘간 경교장을 찾은 조문객은 약 120만 명으로 추산됐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부고가 아니었다. 독립운동의 기억과 분단의 출발이 한 점에서 겹친 사건이었다.

◇ 황해도 소년에서 임정 주석까지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동학농민운동에 황해도 접주로 가담했고, 비밀결사 신민회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운명이 바뀐 건 1919년이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임정의 경찰·치안 책임자)에 올랐다.

이후 내무총장, 국무령을 거쳐 주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광복의 순간까지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았다.

임정은 늘 자금난과 내부 분열에 시달렸다. 김구는 그 흔들리는 조직을 끝까지 붙든 사람이었다.

◇ 폭탄 두 발이 임정을 살렸다

1930년대 초, 상하이 임시정부는 청사 월세조차 내지 못할 만큼 무너지고 있었다. 김구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1931년 일제 요인 처단을 목표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1932년 1월 8일, 단원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세계가 주목했다.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등을 처단했다.

이 두 의거는 임정의 운명을 바꿨다.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군 30만 명이 못한 일을 한국 청년이 해냈다”며 찬사를 보냈다(독립기념관 자료).

이후 장제스 정부의 본격 지원이 시작됐고, 한국 청년들이 중국 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을 길도 열렸다.

그 토대 위에서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됐다. 김구는 의열투쟁(요인 처단 등 무장 저항)을 임정 재기의 지렛대로 삼았다. 다만 의거의 배후가 자신임을 밝힌 뒤 일제의 수배를 받아, 김구 본인은 오랜 도피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해방은 통합이 아니라 분열의 시작이었다. 미군정과 소련군정, 좌우 대립, 미·소 냉전이 겹쳤다.

1948년, 유엔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을 치르기로 결정하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됐다.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밀어붙였다.

김구는 정반대로 갔다.
1948년 2월 10일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그해 4월, 그는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 김일성·김두봉을 만났다. 남북협상이다. 그러나 회담은 별 성과 없이 끝났고, 남과 북에는 각각 단독정부가 들어섰다.

분단을 막으려던 마지막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선택은 지금도 평가가 갈린다. 분단을 막으려는 원칙의 결단이었다는 시각과, 결과적으로 북측에 이용당했다는 비판이 함께 존재한다.

◇ 150년 뒤, 다시 묻다

김구를 쏜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1년도 안 돼 감형됐고, 한국전쟁 때 군에 복귀했다.

암살의 배후는 끝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정부는 사건 직후 한독당 내분으로 몰았지만, 정치적 배경을 의심하는 시선은 오래 이어졌다. 1992년 안두희의 육성 증언, 1993년 국회 조사위 구성, 2001·2009년 미군 비밀문서 공개로 진상의 일부가 드러났을 뿐이다.

2026년, 김구는 다시 호명된다. 올해는 서거 77주기이자 탄생 150주년이다. 유네스코는 2026년을 ‘김구 탄생 150주년 기념해’로 지정했고, 정부는 ‘나의 소원, 평화의 문화’라는 문구를 담은 기념 로고를 공개했다. 학술대회와 남북협상 심포지엄, 경교장 정비 등이 추진되고 있다.

김구는 영웅담으로만 읽기 어려운 인물이다.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식민지 시기 저항의 절정이었고, 남북협상과 경교장의 죽음은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의 균열을 드러냈다.

그가 ‘백범일지’에 남긴 꿈은 “가장 아름다운 나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였다. 분단 80년, 그 꿈은 아직 미완이다. 그래서 김구를 기억하는 일은 추모를 넘어선다. 우리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다시 펴는 일이다.

[오늘, 이 사람]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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